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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비존재로부터 존재를 구출하기

등록 2022-07-08 05:00수정 2022-07-08 09:40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 읽기

존재의 순간들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l 열린책들(2022)

왜 어떤 기억은 다른 기억보다 더 생생할까? 이건 미스터리의 영역이다. 이를테면 6월이라 하면 나는 내 인생의 수많은 다른 6월들은 다 잊었어도 우리 회사 청소노동자랑 대화를 나누던 어느 화창한 아침은 잊지 않고 있다. “안녕. 오늘 날씨 좋네요.” “벌써 6월이 되었어요.” 이렇게 평범한 인사 뒤에 나는 별 뜻 없이 “6월은 어떤 달이에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6월은 최저임금 결정의 달이에요.” 벌써 10년은 된 대화다. 그런데도 나는 6월만 되면 딱 그때만 내가 존재했었다는 듯 이 대화를 떠올린다.

왜 어떤 것은 잊고 어떤 것은 기억하는가? 버지니아 울프는 이것을 ‘비존재’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이를테면 그녀에게 어제는 좋은 날이었다. ‘존재’에서 평균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날씨도 좋았고 강의 빛깔도 마음에 들었고 읽고 있던 책도 좋았다. 기억에 담아두고 싶은 일이 제법 많았다. 그런데 이런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수많은 비존재 속에 묻혀 있다. 점심을 먹긴 먹었는데 누구랑 먹었더라?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의식적으로 살지는 않는다. 해야 할 일을 하고 때 되면 밥 먹고 잔다. 하루는 존재보다 비존재로 이루어지는 부분이 더 많다. 좋지 않은 날은 ‘비존재’의 비중이 훨씬 더 커진다. 몸이 아파 누워 있는 날은 거의 대부분 ‘비존재’나 다름없다.

어린 시절도 ‘비존재’의 비중이 높다. 따라서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에 충격을 받게 되면 그 일은 평생 기억에 남는다. 예를 들면 어렸을 때 버지니아 울프는 잔디밭에서 남자 형제 토비와 주먹으로 치고받고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를 때리려고 주먹을 든 순간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해?’ 그녀는 제풀에 손을 떨구고 토비가 그녀를 때리게 내버려두었다. 버지니아는 그때의 감정을 언제나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슬프고 무력했지만 어마어마한 뭔가를 알아버린 기분이었다. 버지니아는 이런 순간을 ‘존재의 순간들’이라고 불렀다.

나에게는 7월에 해당하는 ‘존재의 순간’이 있다. 2019년경, 지금처럼 무더웠던 7월의 밤에 나는 스웨덴의 기후활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영상을 보고 있었다. 구천을 떠돌던 미래 세대의 분노가 툰베리의 몸을 빌려 나타난 것 같았다. 그런데 툰베리가 이런 말을 했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비치에 가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레스토랑에 가기 위해서 비행기를 탄다.” 그 순간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나잖아!!’ 그 생각이 들자 자아가 딱 쪼개져 버렸다. ‘이제 비행기 타지 말아야 하나 봐’라고 말하는 자아가 먼저 등장했고 그다음 두번째 자아. ‘아, 그래도 코코넛 나무가 있는 비치에 가고 싶은데.’ 이 두 자아는 아직도 혼란스럽게 내 안에 ‘존재’한다. 나는 이 두 자아가 최선의 방법을 찾기 바란다.

그렇다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그런 것처럼 우리가 영영 잊지 못하는, 존재의 순간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존재의 순간들이 우리의 비존재를 배경에서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엔? 내 생각엔 ‘존재의 순간들’은 씨앗이다. 여기서 장차 커다란 나무가 될 뭔가가 자라날 수 있다. 여기서 수많은 뜻밖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정혜윤/<CBS>(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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