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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천지의 재화를 허락 없이 쓰니 도둑질 아닌가”

등록 2022-07-08 05:00수정 2022-07-08 09:36

위진 시대 현학 대가 장담 ‘열자주’
도가 사상 3대서 하나 ‘열자’ 해석

중국철학 전문가 임채우 교수 번역
기우·지음·조삼모사·우공이산 출처

장담의 열자주
장담 지음, 임채우 편역| 한길사 | 4만8000원

<열자>는 <노자> <장자>와 함께 도가의 3대 사상서로 꼽히는 고전이다. ‘기우’ ‘지음’ ‘조삼모사’ ‘우공이산’ 같은 유명한 고사성어의 출처가 되는 책이기도 하다. 그 <열자>의 본문 8편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확정하고 처음으로 주석을 붙인 사람이 동진 시대의 학자 장담(330~400)이다. 중국철학 연구자 임채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교수가 번역한 <장담의 열자주>는 <열자>의 본문과 이 본문에 대한 장담의 주석을 우리말로 옮기고 상세한 해설을 단 책이다. <열자> 본문을 번역한 책은 그동안 여러 종 나왔지만 장담의 주석까지 번역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장담은 위진 시대 현학(노자와 장자의 학설)의 최후를 장식한 학자다. 장담의 학문 이력은 왕필(226~249)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왕필은 역사상 최고의 <노자> 해석자로 꼽히는 사람인데, 그 왕필이 장담의 외가 쪽 증조할아버지다. 왕필의 학문이 워낙 깊어 집안의 외가 후손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던 셈이다. 애초 <열자>는 기원전 1세기 유향이라는 학자가 여러 자료를 정리해 8편으로 편집해 완성했다고 하는데, 장담은 <열자주> 서문에 자신이 <열자> 텍스트를 구하게 된 경위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 장담의 할아버지(장의)가 <열자> 본문 8편 전체를 소장하고 있었는데 ‘영가의 난’(311)으로 피란 가던 중에 잃어버리고 두 편만 지켜냈다가, 외가 쪽 다른 소장자들에게서 나머지 편들을 얻어 전체를 다시 짜 맞추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짜 맞춘 텍스트에 주석을 붙인 것이 바로 <장담의 열자주>다. 그러나 그 텍스트가 애초 유향이 편집한 <열자>와 동일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열자라는 인물도 안개에 싸여 있다. 열자는 기원전 400년 전후의 전국시대에 정나라에서 생존한 도가 사상가로 추정된다.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에 열자 전기가 없어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학자도 있다. 분명한 것은 전국시대에 편찬된 <장자>에 열자라는 이름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장자> ‘소요유’ 편에 “열자는 바람을 타고 다녔으니, 한번 떠나면 보름이 지난 뒤에야 돌아왔다”고 쓰여 있다. <장자>의 신화적 서술과 달리 <열자> 본문에 등장하는 열자는 좀 더 현실적인 인물이다. 제1편 ‘천서’의 제1장은 열자를 이렇게 묘사한다. “자열자(열자의 극존칭)가 정나라 전원에서 산 지 40년이 되었으나 열자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나라의 왕이나 공경대부들도 열자를 평범한 사람으로 보았다.” 또 <열자> 제2편 ‘황제’는 열자가 스스로 배움이 부족함을 깨닫고 3년을 문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치기를 공양했다고 서술한다. 성실히 도를 닦는 검소하고 겸손한 사람이 <열자> 속의 주인공이다.

도가의 3대 사상서 &lt;열자&gt;의 주인공 열자. 열자는 ‘바람을 타고 날아다닌다’는 &lt;장자&gt;의 구절을 따라 그림마다 옷깃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으로 묘사됐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도가의 3대 사상서 <열자>의 주인공 열자. 열자는 ‘바람을 타고 날아다닌다’는 <장자>의 구절을 따라 그림마다 옷깃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으로 묘사됐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열자> 텍스트에는 존재론·인식론부터 윤리학·인생론까지 철학적 사유가 두루 담겨 있다. ‘도’가 형이상학적 본체를 이룬다고 본 점에서는 <노자>와 통하고, 여러 우화를 끌어들여 천지와 인간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장자>와 통한다. 형이상학적 본체론이 집중적으로 서술된 곳이 제1편 ‘천서’다. “도는 본래 처음이 없었으니 끝마침이 있겠는가? 도는 본래가 있지 않았으니, 사라짐이 있겠는가? 생성된 사물은 생성되지 않는 존재로 되돌아가고 유형한 것은 무형한 존재로 되돌아간다.” 이런 형이상학적 서술에 이어 우화 형식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기나라 사람이 천지가 무너질까봐 걱정했다’는 ‘기우’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이야기로 통용되지만, <열자> 본문을 보면 천지가 ‘기’로 이루어져 있고 이 기의 운행 속에서 만물이 제 기능을 한다는 ‘기의 우주론’을 이야기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를 두고 열자는 이렇게 말한다. “천지가 무너지는지 아닌지 나는 알 수가 없으나, 무너져도 한가지요 안 무너져도 한가지다.” 이 말에 장담은 이런 주석을 단다. “만일 무너지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두 무사할 것이요, 무너진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니, 그 사이에 무슨 기뻐하고 근심하고 할 것이 있겠는가?” 기의 우주론에서 시작해 삶과 죽음의 초탈이라는 인생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천서’ 편에 등장하는 ‘도둑질 우화’도 눈길을 끈다. 제나라의 부유한 국씨와 송나라의 빈궁한 상씨가 등장인물이다. 상씨가 국씨를 찾아가 어떻게 부자가 됐는지 비법을 이야기해달라고 하자 국씨가 선뜻 알려준 것이 ‘도둑질’이다. “내가 도둑질하고 1년이 되자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게 됐고, 2년이 되자 넉넉해졌고 3년이 되자 아주 풍족해졌소.” 이 말을 듣고 돌아간 상씨는 닥치는 대로 도둑질하다 잡혀 처음에 가졌던 재산까지 몰수당하고 만다. 상씨가 국씨를 찾아가 원망하자 국씨가 답한다. “당신은 도둑질하는 도를 잃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구려.” 국씨 자신은 하늘의 때와 땅의 이로움을 도둑질해서 곡식을 키우고 집을 지었으며, 땅에서는 새와 짐승을 훔쳤고 물에서는 물고기와 자라를 훔쳤다는 것이다. “저 벼와 곡식, 흙과 나무, 새와 짐승, 물고기와 자라 따위들이 다 하늘이 낸 것이지 어찌 내 소유라고 하겠소. 그렇게 나는 하늘이 낸 물건을 훔쳤으나 재앙이 없었소.”

국씨의 말을 납득하지 못한 상씨가 다시 동곽 선생을 찾아가 물으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국씨의 도둑질은 공도로 한 것이라 재앙이 없었지만 그대의 도둑질은 사심으로 한 짓이므로 죄를 얻게 된 거요.” 이 본문에 대해 장담은 이렇게 주석을 단다. “천지의 덕은 저절로 그러할 뿐이니, 무슨 공이니 사니 하는 이름을 나열할 것이 있겠는가? 공·사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면 도둑질과 도둑질 아닌 것 역시 아무 차이가 없다.” 스스로 그러한 천지의 만물을 가져다 쓴 것이니 ‘공도’든 ‘사심’이든 도둑질이라는 데는 다름이 없다는 얘기다. 이 주석에 대해 옮긴이는 이렇게 해설한다.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 땅 위에 난 풀 한 포기도 본래 인간의 것은 없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용하는 재화는 모두 허락을 받지 않고 임의로 가져다 쓴 것이 아닌가?” 그 천지의 것을 멋대로 훔치는 도둑질이 도를 넘어 우리 시대의 생태위기·기후위기를 낳았을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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