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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성찰 없는 외침의 쳇바퀴…‘공정 담론’, 누가 왜 만드는가

등록 2022-07-29 05:00수정 2022-07-29 10:58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첫 책
커뮤니케이션 이론 동원해 공정 담론 분석
연대·상호부조로 나아가는 새로운 정의론
2020년 7월9일 서울 서대문구 소셜팩토리에서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 논란에 대한 청년 긴급토론회 ‘공정같은 소리하네!’가 열렸다. 토론회를 생중계하는 주최자의 노트북 오른쪽 화면에 청년들의 실시간 댓글이 올라오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2020년 7월9일 서울 서대문구 소셜팩토리에서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 논란에 대한 청년 긴급토론회 ‘공정같은 소리하네!’가 열렸다. 토론회를 생중계하는 주최자의 노트북 오른쪽 화면에 청년들의 실시간 댓글이 올라오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공정 이후의 세계
김정희원 지음 l 창비 l 1만7000원

‘공정’은 아직도 이 시대의 화두일까? 최근 한국 사회에서 최우선 가치처럼 여겨지고 있는 공정은 경쟁, 능력주의 등과 하나의 꾸러미를 이루고 있는데, 이 꾸러미는 우리를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어떤 미로로 데려간다. 한 젊은 정치인은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을 설파하며 공정성에 민감하다는 청년 세대의 지지를 받는 등 재미를 봤지만, 1등부터 100등까지 모두를 동일한 잣대로 한 줄로 세울 수 있는 평탄한 세계가 현실 속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그 누구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경쟁이란 게임 속에 있는 한 모든 이들은 저마다의 불리함을 지닌다. 공정에 대한 요구란 어쩌면 이 게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이 호소하는 고통의 아우성 같은 것일지 모른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김정희원(41)은 자신의 첫 단독 저작인 <공정 이후의 세계>를 “공정에 관한 이야기를 그만하고 싶어서” 썼다고 말한다. 공정 담론과 능력주의는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피로를 불러일으키며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으며, 그 폐해에 대해 이미 날카로운 비판이 여럿 제기된 바 있다. 제목에 새겨진 대로 지은이는 이제 ‘공정 이후의 세계’에 대해 말해보자고 제안한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뤄졌는데,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바탕으로 삼아 나름의 관점으로 공정 담론을 해부하는 것이 1부, ‘돌봄’에 기초한 새로운 정의론을 제시하는 것이 2부다.

책의 알짬은 “담론적 폐쇄”라는 개념을 동원해 현재 한국 사회 공정 담론을 분석하는 대목이다. 커뮤니케이션 학자 스탠리 디츠가 제기한 이 개념은 “특정 집단에 의해 의미의 체계적 왜곡이 일어나는 현상”을 가리킨다. 간단히 말해, 기득권을 선점하고 있는 집단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어떤 의미를 왜곡해버려 쳇바퀴 돌듯 같은 논의만 반복하도록 만드는 현상이다. “담론적 폐쇄 개념은 한국의 공정성 담론이 왜 계속 제자리걸음인지, 왜 몇 년이 지나도록 생산적인 논의로 이어지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실패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인국공 사태’(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등에서 보듯, 우리 사회에서 제기된 공정 담론은 대체로 자신이 느끼는 부당함, 억울함, 박탈감 등을 ‘공정하지 않다’는 외침으로 표출하는 데 열중할 뿐 고용 형태나 노동 조건 등 정확한 사실과 의미를 따져보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왜곡된 의미와 기존의 권력관계를 자기복제하고, 이해관계와 갈등을 은폐하고, 매 사안마다 같은 방식으로 논의를 종결시키려” 하는 폐쇄 담론이었던 셈이다.

지난 2020년 6월 인천국제공항공사노동조합 소속 조합원들이 서울 청와대 인근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비정규직 보안검색 요원들의 정규직 전환 관련 입장을 발표하며 손팻말을 들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 2020년 6월 인천국제공항공사노동조합 소속 조합원들이 서울 청와대 인근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비정규직 보안검색 요원들의 정규직 전환 관련 입장을 발표하며 손팻말을 들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이런 담론적 폐쇄를 만들어내는 것은 누구인가? 지은이는 구조적인 불평등, 그리고 정체성에 기반한 차별·혐오를 통해 기득권을 누리는 집단이 공정 담론을 “무기화”하고 있다고 본다. 능력에 따른 차별과 서열화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능력주의가 되레 구조적으로 고착된 불평등 체제의 수혜자들에게 오히려 더 유리하다는 능력주의의 허구 또는 역설은 이미 꽤 알려졌다. 지은이는 여기에 젠더와 인종 같은 “정체성에 기반한 차별과 혐오”의 문제를 결코 생략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가 100 대 6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부동의 1위인데도, 이를 바로잡기 위한 과도기적 수단인 ‘여성할당제’가 ‘역차별’이라 공격받는 등 공정 또는 능력주의 담론은 정체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주된 기반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 ‘능력’이란 개념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의 필요에 따라 정의되어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인정의 격차를 낳는, 보편적일 수 없는 개념이다.

지은이는 근본적으로 이런 온갖 문제들의 뿌리에 ‘백인 남성 중심’을 준거로 삼아 발전해온 “개별주의적 존재론”이 있다고 지적한다. 개별주의적 존재론은 각각의 개인을 원자처럼 고립된 존재로만 인식했기에 여기에 뿌리를 둔 전통적인 정의론과 도덕철학은 오랫동안 개인들 사이의 자유경쟁과 그 결과를 따지는 ‘비례적 정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누가 더 능력 있고 바람직한지 경쟁을 벌이는 ‘비교와 선별의 위계’는 그렇지 않은 집단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그 바탕에 두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근본적 한계에 부딪혔으며 더이상 ‘자유론’으로 우리가 마주하는 난제―예컨대 경제 불황, 디지털 기술의 도입, 기후변화 위기 등을 들 수 있다―를 해결할 수 없다.”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창비 제공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창비 제공

이 때문에 지은이는 개별주의적 존재론 대신 “관계적 존재론”에 바탕을 둔 정의론과 도덕철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 대목이 이 책의 두번째 알짬을 이룬다. 관계적 존재론의 핵심은 ‘돌봄’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자립적인 존재를 상정하는 개별주의적 존재론과 다르게, 관계적 존재론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등 근본적으로 상호의존적인 존재이며 공동체를 이루고 살 수밖에 없다고 본다. 관계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볼 때, 보편은 ‘비례적 정의’ 같은 초월적이고 일반화된 법칙 같은 것이 아니라 타인들과의 구체적인 관계로부터 도출된다. 우리 모두가 상호의존하고 있으며 공동체가 있기에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적 돌봄”을 우선시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지은이는 이런 관계론적 존재론을 바탕에 둔 ‘급진적 자기돌봄’이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여기서 자기돌봄은 단지 ‘나를 위한다’는 개념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1970년대 ‘컴비강 공동체’ 등 미국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제기했는데, 그것은 내가 겪는 고통이 단지 나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부조리와 폭력에서 기인한다는 인식에서 비롯했다. “나의 회복이 곧 모두의 회복인 돌봄. 연대를 위한, 손을 맞잡기 위한, 동지가 되기 위한 돌봄. 내가 속한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자기돌봄. 그러므로 자기돌봄은 곧 타자돌봄이 된다.” 출구가 없는 미로 같은 공정 담론 안에 갇혀 원자화된 개인으로 마모될 것인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시작할 것인가, 책은 묻는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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