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피해 연대자의 사법 연대기
‘그림자’ 되어 다양한 연대 활동
기울어진 수사·재판 구조 비판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연대 고민도
‘그림자’ 되어 다양한 연대 활동
기울어진 수사·재판 구조 비판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연대 고민도
현재 형사사법 절차에서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니지만, 입증 책임 등 막중한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일러스트레이터 임우정
피해자에서 생존자, 그리고 감시자가 된 마녀 D의 사법 연대기
D 지음, 김수정·김영주 감수 l 동녘 l 2만2000원 애초 자신도 성폭력 피해자였다. 가족들에게도 알릴 수 없어 오롯이 혼자 싸워야 했다. 피해자로서 경험한 사법 시스템은 엉망이었다. 담당 경찰은 가해자와 형, 동생으로 친밀하게 지내며 피해자에게 사건의 진행 상황을 알리지 않았다. 불기소 의견으로 사건이 송치된 뒤 변호사는 왜 수사관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않았냐고 질책했다. 재판에서 가해자는 변호인의 도움을 받아 마음껏 방어권을 행사했으나, 피해자에겐 어떤 무기도 없었다. 가림막도 없이 증인석에 선 그에게 피고인 쪽 변호인은 “진짜 피해자라면 증인석에서 저렇게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천신만고 끝에 1심에서 유죄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가해자는 명예훼손, 모욕, 위증 등 다양한 명목으로 ‘보복성’ 고소를 이어갔다. 가해자와 그 무리들이 자신을 ‘마녀’라 불렀으니, 기꺼이 ‘마녀’가 되어 주기로 했다. “가해자와의 싸움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다른 피해자와 연대하며 시스템을 바꾸는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것이 ‘마녀’로서 내가 가해자를 사냥하는 방식이다.” 주된 활동 무대는 사법 시스템이다. 사법 시스템을 피해자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하여 단계별로 필요한 정보를 안내하는 등 피해자의 ‘그림자’가 되어 돕는다. 그렇게 피해자와 ‘직접 연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는 2020년 또 한 차례 자신의 역할을 바꾸었다. ‘마녀’라는 이름을 버리고, 언제라도 대체 가능한 사람이 필요하다며 ‘연대자 디(D)’가 되기로 한 데에는, “‘혼자’ 하는 연대에서 ‘시스템’을 바꾸는 연대로 나아”가려는 전환이 있었다. 피해자가 제대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려면, 이 시스템을 감시하고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더욱 깊고 넓은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대자 디’가 쓴 책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는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몰아붙이고 더 큰 상처를 남기게 만드는 사법 시스템을 정조준한다. 성범죄가 발생하면 우리 사회는 피해자에게 “법대로” 하면 된다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지금의 시스템 아래에서 “‘법대로’ 하는 것은 피해자가 많은 상실을 각오해야 하는 선택지”다. 오롯이 피해자에게 주어지는 입증 책임, 수사 과정에서 불거지는 2차 가해, 재판부의 ‘솜방망이’ 처벌, 가해자가 남발하는 ‘보복성’ 고소, 피해자 지원 체계의 공백 등 그 양상도 대동소이하다.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지은이는 현행 사법 시스템 구석구석을 들춰내고 비판한다. 성범죄 사건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부족하면서도 ‘재량’을 휘두를 수 있는 재판부가 대표적이다. 성범죄 재판에서 피고인이 된 가해자는 본인에게 주어진 ‘방어권’을 십분 누리지만, 피해자는 단지 ‘증인’이 되어 부수적, 주변적, 수동적 지위에 놓인다. 이런 상황에서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법정에 나와 일관되게 증언하라고만 요구할 뿐 제대로 된 증인지원 절차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자신이 나오는 피해 영상을 보며 신문을 받거나, 미성년 피해자가 공간 분리 없이 가림막만 둔 채 신문을 받는 일들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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