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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성폭력 피해자, 기울어진 ‘법’에 맞서 연대자가 되다

등록 2022-08-05 05:00수정 2022-08-05 09:22

성범죄 피해 연대자의 사법 연대기
‘그림자’ 되어 다양한 연대 활동

기울어진 수사·재판 구조 비판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연대 고민도
현재 형사사법 절차에서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니지만, 입증 책임 등 막중한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일러스트레이터 임우정
현재 형사사법 절차에서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니지만, 입증 책임 등 막중한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일러스트레이터 임우정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피해자에서 생존자, 그리고 감시자가 된 마녀 D의 사법 연대기
D 지음, 김수정·김영주 감수 l 동녘 l 2만2000원

애초 자신도 성폭력 피해자였다. 가족들에게도 알릴 수 없어 오롯이 혼자 싸워야 했다. 피해자로서 경험한 사법 시스템은 엉망이었다. 담당 경찰은 가해자와 형, 동생으로 친밀하게 지내며 피해자에게 사건의 진행 상황을 알리지 않았다. 불기소 의견으로 사건이 송치된 뒤 변호사는 왜 수사관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않았냐고 질책했다. 재판에서 가해자는 변호인의 도움을 받아 마음껏 방어권을 행사했으나, 피해자에겐 어떤 무기도 없었다. 가림막도 없이 증인석에 선 그에게 피고인 쪽 변호인은 “진짜 피해자라면 증인석에서 저렇게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천신만고 끝에 1심에서 유죄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가해자는 명예훼손, 모욕, 위증 등 다양한 명목으로 ‘보복성’ 고소를 이어갔다.

가해자와 그 무리들이 자신을 ‘마녀’라 불렀으니, 기꺼이 ‘마녀’가 되어 주기로 했다. “가해자와의 싸움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다른 피해자와 연대하며 시스템을 바꾸는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것이 ‘마녀’로서 내가 가해자를 사냥하는 방식이다.” 주된 활동 무대는 사법 시스템이다. 사법 시스템을 피해자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하여 단계별로 필요한 정보를 안내하는 등 피해자의 ‘그림자’가 되어 돕는다. 그렇게 피해자와 ‘직접 연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는 2020년 또 한 차례 자신의 역할을 바꾸었다. ‘마녀’라는 이름을 버리고, 언제라도 대체 가능한 사람이 필요하다며 ‘연대자 디(D)’가 되기로 한 데에는, “‘혼자’ 하는 연대에서 ‘시스템’을 바꾸는 연대로 나아”가려는 전환이 있었다. 피해자가 제대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려면, 이 시스템을 감시하고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더욱 깊고 넓은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대자 디’가 쓴 책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는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몰아붙이고 더 큰 상처를 남기게 만드는 사법 시스템을 정조준한다. 성범죄가 발생하면 우리 사회는 피해자에게 “법대로” 하면 된다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지금의 시스템 아래에서 “‘법대로’ 하는 것은 피해자가 많은 상실을 각오해야 하는 선택지”다. 오롯이 피해자에게 주어지는 입증 책임, 수사 과정에서 불거지는 2차 가해, 재판부의 ‘솜방망이’ 처벌, 가해자가 남발하는 ‘보복성’ 고소, 피해자 지원 체계의 공백 등 그 양상도 대동소이하다.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지은이는 현행 사법 시스템 구석구석을 들춰내고 비판한다. 성범죄 사건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부족하면서도 ‘재량’을 휘두를 수 있는 재판부가 대표적이다. 성범죄 재판에서 피고인이 된 가해자는 본인에게 주어진 ‘방어권’을 십분 누리지만, 피해자는 단지 ‘증인’이 되어 부수적, 주변적, 수동적 지위에 놓인다. 이런 상황에서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법정에 나와 일관되게 증언하라고만 요구할 뿐 제대로 된 증인지원 절차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자신이 나오는 피해 영상을 보며 신문을 받거나, 미성년 피해자가 공간 분리 없이 가림막만 둔 채 신문을 받는 일들이 벌어진다.

‘합의’가 악용되는 과정은 기가 막힐 정도다. 성범죄에서 ‘합의’ 자체는 감경사유가 아니지만 ‘피해자의 처벌불원’은 감경사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합의 자체만으로도 수사 과정에서 기소유예를, 재판 과정에서 벌금형이나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이끌어내는 수단이 된다. 합의에 실패하면, 가해자는 합의를 하려 했다는 사실을 내세워 피해자가 돈을 노리고 접근했다고 몰아간다. 가해자가 합의하려 했다는 사실을 재판부가 ‘진지한 노력’으로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기준조차 모호한 ‘정상참작감경’은 법정형 하한을 재판부가 재량으로 절반으로 깎을 수 있게 해주는 무기다. 재판 단계에서 ‘신상정보 공개·고지명령’은 모든 재판 절차가 마무리되고 유죄가 확정된 후에야, 실형을 선고받았을 경우에는 출소 후에나 공개된다. ‘솜방망이’ 판결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사 과정은 또 어떤가?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면 안 된다며 고소장을 반려하거나 고소 취하를 유도하는 경찰은 아예 가해자들로부터 ‘착한 수사관’이라 불린다. “경찰이라니_가해자인줄”이라는 캠페인이 벌어질 정도로 ‘2차 가해’ 사례도 다반사. “검경수사권 조정 이후인 2021년부터 인력 부족과 업무 폭증을 들어 수사 지연을 정당화하는 일도 잦”으며, “수사 지연, 사건 암장, 인권 침해 등은 진행형의 문제다.” 이밖에 “재판 과정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판사에게 떠넘기고 숨어 있는” 검찰, 피해자를 불러내 증언의 고통을 안기거나 피해자의 정보를 유포하고 인신공격을 하는 것으로 가해자들의 만족감을 충족시켜주는 변호인, 무고·명예훼손·모욕·업무방해 등으로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는 ‘보복성’ 고소 전략, 여성혐오를 팔아먹는 언론 등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서로서로를 돌리며 피해자를 지옥으로 내모는 “법대로” 시스템을 굴려가고 있다. 예컨대 성폭력 무고의 경우, 가해자가 성폭력으로 신고·고소당한 뒤 피해자를 무고로 고소하는 사건의 불기소율과 기소 뒤 무죄 비율이 월등히 높다. 또 성폭력 무고에 대한 검찰의 인지 비율은 다른 범죄에 대한 검찰의 무고 인지 비율의 두 배(27.7%)에 달한다. 성폭력 무고 대부분이 ‘보복성’ 소송인데도, 검찰이 되레 이를 더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명백한 근거다.

“엔(n)번방은 판결을 먹고 자란다” 운동 등 변화에 대한 요구는 갈수록 거세지고 있으며, 시스템이 변화하는 움직임도 일부 보이고 있다. 반면 “2022년 들어 본격적으로 피해자, 약자,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활용해 정치 장사를 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등 ‘백래시’ 역시 만만치 않다. 지은이는 무엇보다 “시스템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움직이며, 사람이 바꾼다. 시스템 속 사람들의 상호 이해와 소통, 비판과 견제는 분리되지 않으며 함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책 제목대로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는 것이다. ‘성범죄 형사재판 모니터링 수첩’을 부록으로 싣고 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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