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세기 한국문학, 차이의 근대성
유럽중심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
이도흠 지음 l 소명출판 l 5만6000원
국문학자 이도흠 한양대 교수는 원효의 화쟁사상을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서양 이론과 결합해 ‘화쟁기호학’이라는 독창적인 텍스트 해석 방법론을 창안한 학자다. <18~19세기 한국문학, 차이의 근대성>은 지은이가 세운 이 방법론에 입각해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와 문학작품에서 근대성의 지표를 찾아내고 근대화 양상을 분석하는 저작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본론(제2부)의 분석 작업의 이론적 토대를 상술하는 제1부다. 여기서 지은이는 기존의 모든 근대화-근대성 담론을 비판한 뒤 ‘차이의 근대성론’을 정립하고 그 방법론을 상세히 밝힌다.
근대화-근대성 담론의 원형은 ‘서구 중심의 근대성론’이다. 자본주의 체제와 근대 과학기술, 산업화와 합리화, 국민국가와 민주주의, 개인주의와 휴머니즘 따위의 온갖 근대의 지표들이 선진 유럽에서 먼저 발흥했고 후진 아시아가 이것들을 수용함으로써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것이 서구 중심의 전통적인 근대화론이다. 이 이론을 따르면 근대화란 곧 서구화다. 비서구 지역이 서구의 보편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고 뒤따름으로써 근대화를 이룬다고 보는 것이다. 이 근대성 담론은 서양과 동양을 ‘빛과 그림자’로 대립시켜 서양의 온갖 부정적인 것을 동양에 투사한 뒤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오리엔탈리즘으로도 나타난다. 이 서구의 근대성 담론과 오리엔탈리즘이 일제강점기 이래 국내의 근대화 담론을 지배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 책의 제1부는 이 오리엔탈리즘적 근대성 담론의 여러 변형태들을 해체한다.
지은이가 해체 대상으로 삼는 근대화론이 일제강점기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 임화의 ‘이식문화론’, 좌파 경제학자 백남운의 ‘자본주의 맹아론’, 해방 후 민족주의자들의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수탈론’, 또 근년에 기승을 부린 우익 경제학자들의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이런 근대화 담론들은 서구가 창출한 근대성을 척도이자 모범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 역사가 조선 후기에 스스로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루었는지, 아니면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야 자본주의적 발전이 본격화했는지 하는 모든 논의가 서구 근대성을 표준으로 삼아 거기에 근접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표면의 논의 방향은 각기 다르지만 서구의 근대화를 근대화의 유일한 길로 보는 동일성 담론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외부 영향 없이 순수한 내적 발전의 실증을 찾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며, 외부의 영향이 있다고 해서 내재적 발전을 부정하는 것은 식민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식문화론’을 주장한 일제강점기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임화. 임화는 “조선의 신문학은 서구문학의 이식과 모방 가운데서 자라났다”고 단언하면서 동시에 “문화이식이 고도화하면 할수록 반대로 문화 창조가 내부로부터 성숙한다”고 주장했다. 지은이는 임화의 전체 논의가 마르크스주의 발전사관에 토대를 둔 것이기에 근대화 노선을 하나로만 본다는 한계가 뚜렷하다고 비판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서구의 근대화를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이런 동일성 담론은 서구의 기준과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오리엔탈리즘적 폭력을 내장한 것들이다. 지은이는 근대성에는 서구식 근대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양상의 근대성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조선이 이룬 조선의 근대성도 당연히 있을 수 있다. 이때 지은이가 근대의 지표로 제시하는 것이 ‘기존 사회의 해체를 지향하여 그 모순을 드러내는 것, 그 양상이 지속적인 것, 미래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 들이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조선 근대성의 명확한 지표를 보여준 문학 텍스트 가운데 하나가 수운 최제우의 <용담유사>다. 지은이는 이 한글 가사에 담긴 평등과 해방의 정신이 19세기 말 동학농민전쟁 때 ‘집강소’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양반과 천민이 차별 없이 평등하게 모인 자치기구 집강소야말로 조선의 근대성을 보여주는 적실한 사례다. 이렇게 지은이는 기존의 서구 중심의 근대성론에 깃든 동일성 담론을 해체하고 거기서 ‘차이의 근대성론’을 이끌어낸다. 근대화의 길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다양하다는 것, 이것이 지은이의 핵심 주장이다.
더 주목할 것은 지은이가 제시하는 ‘차이의 근대성론’의 바탕을 이루는 근본 사상이다. 동일성 담론은 차이를 배제하는 담론이다. 그러나 타자와 마주 서지 않는 한 동일성은 구성되지 않는다. ‘나의 동일성’도 ‘너의 다름’과 맞부딪쳤을 때에야 성립한다. 지은이가 강조하는 것은 이 타자가 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데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흔히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실체화하는 나와 너, 주체와 타자, 제국과 신민, 동양과 서양, 근대성과 식민성은 서로 대립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고 생성시키는 불일불이의 관계를 이룬다. 이 불일불이의 사상을 확고히 틀어쥘 때 서양의 이항대립적 사유를 극복할 수 있다. 서로 대립하는 것들은 단순히 대립하는 것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세우고 키우는 대대(待對)의 관계에 있다. 원효의 화쟁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곧 대대하는 것들을 아울러 더 큰 하나로 회통하는 방법이다. “자신과 타자 사이의 연기적 관계를 깨닫고 대립적인 것을 내 안에 모셔서 하나로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 바로 대대이고 화쟁이다.”
이렇게 보면 근대화의 길은 어느 한 나라가 타자와 아무런 관련도 없이 홀로 이루어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모든 사회 혹은 모든 나라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 속에서 저마다 다른 근대화의 길을 걷는다. 서구가 비서구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기만 한 것도 아니고 비서구가 일방적으로 서구의 영향을 받기만 한 것도 아니다. 서구도 비서구의 식민지를 통해 근대화 동력을 얻었으며, 서구 내부 나라들, 이를테면 영국·프랑스·독일도 서로에게서 배우며 저마다 고유한 근대화 경로를 밟았다. 지은이는 여기서 ‘눈부처 차이론’을 이야기한다. 아주 가까이 다가가 상대방의 눈동자를 보면 그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인다. 그 형상이 부처님과 비슷해 눈부처라고 부른다. ‘너’ 안에 ‘나’가 있고 ‘다름’ 속에 ‘같음’이 있는 것이다. 차이의 근대성론은 이렇게 타자에게서 나의 형상을, 그것도 내 본디 모습인 부처의 형상을 본다는 근본 사상에 입각해 있다. 그런 시야를 확보할 때 우리는 폭력과 배제의 동일성 사상에서 벗어나 다름을 수용하고 다름에서 배우고 다름과 어우러지는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그 차이를 아우르는 참된 보편성을 원효는 ‘일심’(한마음)이라고 불렀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