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
유동하는 삶을 헤쳐나간 영혼
이자벨라 바그너 지음, 김정아 옮김 | 북스힐 | 3만6000원
지그문트 바우만(1925~2017)은 21세기 학문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학자다. 학자들이 학문 활동에서 물러나거나 죽음을 준비하는 70대에 들어서야 바우만은 대중의 환호를 받는 저작들을 써내기 시작했다. 폴란드 사회학자 이자벨라 바그너가 쓴 <지그문트 바우만>은 폴란드에서 태어나 뒤늦게 영국에 정착한 이 유대계 사상가의 일생을 그린 첫 전기다. 지은이는 바우만이 남긴 자전적 기록과 바우만 생전에 직접 만나 행한 장시간 인터뷰, 그리고 바우만의 주변 사람들이 남긴 증언을 토대로 삼아 이 열정적이고 독창적인 학자의 초상을 그려냈다.
현대성을 탐사하는 바우만 저작들을 시종 관류하는 핵심 개념은 ‘유동성’(Liquidity)이다. 이 전기는 이 개념이 유대인으로서 바우만이 겪은 쓰라린 경험에서 발효된 것임을 알려준다. 20세기 유럽 사회를 휘저은 반유대주의 광기를 빼놓고는 바우만을 설명할 수 없다. 반유대주의야말로 바우만의 삶을 난타한 포악한 힘이었다. 바우만은 폴란드인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분투했으나 폴란드 내부의 완강한 반유대주의는 끝내 바우만을 나라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바우만은 조국에서 버림받고서야 자신이 유대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바우만이 태어난 곳은 독일과 맞닿은 폴란드 서부 포즈난이다. 바우만 출생 당시 폴란드 도시 인구의 3분의 1이 유대인이었다. 포즈난은 유대인 인구가 1.2%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반유대주의가 가장 기승을 부리는 곳이었다. 유대인 혐오는 어린 바우만도 비껴가지 않았다. 총명한 두뇌로 차별을 뚫고 들어간 김나지움(인문계 중등학교)에서 바우만은 교실 뒤쪽 끝 ‘게토 의자’에 앉아야 했고, 성적과는 상관없이 1등 자리를 폴란드인 학생에게 내주어야 했다. 10대 초반에 바우만은 청소년 시온주의(유대민족주의) 단체에 가입해 민족 차별이 없는 나라를 꿈꾸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환란은 1939년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벌어졌다.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 6년 동안 폴란드 땅에 남아 있던 유대인 90%가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됐다. 바우만 가족은 동부로 피신해 소련이 점령한 폴란드 땅에 머물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다시 소련 국경을 넘어 시골 마을의 콜호스(집단농장)에 정착했다. 유대인 차별이 없던 그 시절의 소련에서 바우만은 만인 평등의 공산주의 이념을 받아들였다. 1942년 17살에 고리키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하고, 1년 뒤 입대해 소련군 휘하의 폴란드인민군에 들어갔다. 폴란드인으로서 조국을 해방하는 일을 하고 싶었기에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폴란드인민군 제4보병사단에 배속된 바우만은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로 정치장교가 됐다. 바우만이 속한 군대는 소련군과 함께 폴란드 탈환에 앞장섰다.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유대인으로서 배척당해 유동하는 삶이 바그만의 사상을 주조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더 큰 변화는 폴란드 해방과 함께 찾아왔다. 바우만은 1945년에 신설된 국내보안대 장교가 돼 군인들의 정치교육을 담당했다. 바우만은 사회주의 건설이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폴란드노동자당에 가입하고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1952년 소련과 동유럽에서 일어난 반유대주의 물결이 폴란드에 닥쳤다. 이 물결에 휩쓸려 바우만은 군복을 벗어야 했다. 유대인이라는 표지는 공산주의 체제에 헌신하는 정치장교의 삶으로도 지워지지 않았다. 학업으로 발길을 돌린 바우만은 1956년 바르샤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됐다.
이 무렵 소련과 동유럽을 뒤흔든 사건이 일어났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가 1956년 2월 비공개 당대회에서 ‘개인숭배와 그 결과’라는 제목의 스탈린 범죄 고발 연설을 했다.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바우만의 신념이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 변화의 물결을 타고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새로 폴란드 실권자가 되자 바우만은 새 체제에 한번 더 기대를 걸었다. 그해 11월에는 ‘학문의 독점을 반대한다’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모든 꽃이 피어나게 하라. (…) 학계에서 벌어지는 논쟁이 과학적 방법론으로 해결되게 하라. 학문에서 행정이 특권을 누리지 않게 하라.” 마르크스주의만 가르쳐서는 안 되며 당이 학문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선언이었다. 이 선언과 함께 바우만은 폴란드 학계의 ‘수정주의 진지’ 구축자가 됐다.
비교적 순탄하게 학문생활을 하던 바우만에게 또다시 시련이 닥쳤다. 이스라엘과 아랍이 맞붙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이었다. 사회주의 이집트를 지지하던 동유럽에서 반유대주의 불길이 타올랐고 고무우카 정권은 유대인들을 ‘시오니스트’로 규정해 탄압하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누가 유대인이고 아닌지를 정의했듯이 고무우카도 ‘시온주의자’라는 꼬리표를 스스로 정의했다.” 바우만은 모든 것을 국가에 빼앗긴 채 가족과 함께 폴란드에서 추방당했다. 폴란드인이 되고자 그토록 노력했으나 조국은 바우만을 국경 밖으로 밀어냈다. 바우만 가족은 폴란드 탈출에 도움을 준 이스라엘로 갔다. 그러나 여기서도 경계 바깥 이방인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이스라엘인 대다수 생각에 맞서 바우만은 이스라엘인과 아랍인이 똑같이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바우만은 3년 뒤 영국 리즈로 거주지를 옮겼다. 바우만은 40대 후반에 리즈대학교에서 처음으로 견딜 만한 안식처를 찾았다.
바우만이 ‘글 쓰는 학자’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기까지는 그 뒤로도 2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었다는 것이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외국어로 자신의 생각을 정교하게 표현하는 데는 긴 훈련의 시간이 필요했다. 바우만은 1989년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를 출간했다.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이 겪은 일을 기억하고 해석하는 데 바친 책이었다. 이 책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바우만은 75살이 된 2000년에 <액체 근대>를 펴내 세계 대중의 사랑을 받는 지식인으로 떠올랐다. 액체의 유동성을 ‘모든 고정된 것이 녹아내려 사라지는’ 근대성의 핵심 이미지로 삼은 책이었다. 이후 바우만은 죽을 때까지 유동성 개념으로 현대 세계를 분석하는 책들을 방출하듯 써냈다. 끝없이 유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유대인이라는 운명이 바우만의 삶을 짓밟아 사상의 수액을 뽑아낸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