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 페미니스트
클라리스 쏜 지음, 송경아 옮김 l 여이연(2020)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동의×동의 적극적 합의’ 콘퍼런스가 열렸다. 성/관계를 맺기 전 STI(성매개감염)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 서로의 욕망과 지향을 어떻게 조율할지를 탐구하는 자리였다. 이 내용이 포털 사이트 메인에 실리자 순식간에 악플이 도배됐다. 인신공격, 성희롱이 난무하는 댓글 중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다. ‘합의는 간단하다. 관계 전에 동의한다는 내용 녹음하고, 중간에 녹음하고, 후에 녹음하면 된다.’ 그에게 적극적인 합의란 “이 섹스 너도 동의한 거지? 응?”에 초점에 맞춰져 있었다. 단지 오케이 사인만 받으면 합의는 물론이고 만족스러운 섹스가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런 태도를 볼 때마다 왜 적극적 합의가 이토록 어렵고 절실한지 알 수 있다.
욕망과 의사소통의 부재를 해소할 방법을 이미 고민한 이들이 있다. <S&M 페미니스트>를 쓴 클라리스 쏜도 그중 한 명이다. BDSM은 본디지, 훈육, 지배-복종,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약자로, 바닐라 섹스(성향이 포함되지 않은 섹스)와는 다른 욕망을 탐구하고 실천하는 영역이다. 물리적이거나 심리적 고통을 주는 일, 받는 일, 수치를 즐기는 일 등 다양한 욕망이 BDSM에 포함되어 있다. 개방적인 성교육을 받아왔다는 저자 역시 자기의 욕망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회적으로 결정된 성적 대본, 성에 대한 가정에 의문을 품어보지 않은” 대본에 몸을 맡긴 채 상대에게 자기가 원하는 걸 말해도 괜찮은지 망설이던 시간이 길었다. 그 대본의 끝은 남성의 오르가슴(사정)이었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한 장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1983년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를 원작으로 했다. 피아노 교수인 여주인공은 완벽주의자이면서도 가학·피학적 페티시즘을 가진, 성적으로 억압된 인물로 그려진다.
수많은 실패 끝에 저자는 자신을 BDSM 성향자로 받아들인다. SM과 학대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동의이므로, 플레이를 하기 전 세밀한 의사소통은 필수다. ‘손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건 가능하지만 다른 도구로 때리는 건 불가능. 정신적 복종보다 힘으로 제압하는 걸 선호. 플레이만 하고 삽입섹스는 불가능.’ 이렇게 수많은 내용이 플레이 전에 논의된다. 플레이 중에도 세이프워드(플레이를 멈추는 안전어)와 체크인(중간중간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는 행위)을 통해 행위를 멈추거나 조율한다. “세이프워드와 체크인 이야기의 제일 큰 교훈은 동의가 단 한 번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의는 언제나 일어나고 있고, 늘 재협상 되거나 철회할 수 있다.”
가장 변태적이고 이상하다고 불리는 이 관계에서 안전하고 풍부한 성적 실천을 배운다. 바닐라 섹스를 하기 전, 당신은 상대와 서로의 욕망을 구체적으로 나눈 적이 있는가? 섹스하는 중에 ‘그만’이라는 말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진 적이 있는가? 안전어를 정한 적이 있는가? 저자는 불확실한 욕망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고백하면서 그렇기에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르가슴도, 육체적인 쾌락도 ‘동의’를 의미하지 않으며, 설사 오르가슴을 느꼈어도 내가 원하지 않았다면 그건 동의가 아니다. 사랑도 동의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사랑해도 섹스를 거부할 수 있다.
합의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내 몸과 마음과 욕망도 이토록 복잡한데 어떻게 함께하는 일이 쉬울 수 있을까. 그러므로 나는 섹스에서 합의를 단지 ‘오케이?’라고 여기는 이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생각하는 섹스가 뭔가요? 내가 오케이 하면 당신은 어디까지를 상상하나요? 이 책을 읽는다면 결코 간단하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홍승은/집필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