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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균질적 단일언어’ 향해 달려온 우리말 형성사

등록 2022-10-07 05:00수정 2022-10-07 22:26

조선어학회 ‘마춤법 통일안’ 중심
우리말 표기법 형성되는 과정 살펴

표준어·소리대로·어법 3대 원칙
“이질적·복수적 규범 불가능한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든 ‘한글 목활자 소자’.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든 ‘한글 목활자 소자’.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

‘한글 마춤법 통일안’ 성립사를 통해 본 근대의 언어사상사
김병문 지음 l 뿌리와이파리 l 2만2000원

“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

우리는 ‘한글 맞춤법’(2017년 고시) 제1장 총칙의 제1항에 나오는 이 문장에 따라 우리말을 글로 담는다. 이 원칙의 뿌리를 좇으면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제정한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하 통일안)에 닿는다. 맞춤법에 여러 차례 수정이 있었지만 통일안이 애초 제시했던 이 원칙만은 변하지 않았다. “한글 마춤법(綴字法)은 표준말을 그 소리대로 적되, 語法에 맞도록 함으로써 原則을 삼는다.” ‘표준어’, ‘소리대로’, ‘어법에 맞도록’ 세 가지가 핵심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원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잘 새겨보면 원칙들 사이에 어떤 긴장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소리대로’와 ‘어법에 맞도록’ 사이의 충돌이 대표적이다. “꽃이[꼬치]”를 소리대로 적으려면 “꼬치”가 되지만 맞춤법은 이를 ‘소리대로’가 아니라 ‘어법에 맞도록’ “꽃이”로 적으라 한다. ‘소리대로’가 유명무실해지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애초에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이 아니라 “어법에 맞도록 하되, 예외적인 경우엔 소리대로”로 하지 않았을까?

국어학자 김병문(연세대 미래캠퍼스 근대한국학연구소 부교수)의 <‘한글 마춤법 통일안’ 성립사를 통해 본 근대의 언어사상사>는 1933년 통일안 제정을 중심으로 삼아 우리말과 표기법을 둘러싼 ‘언어적 근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파고드는 책이다. 근대로 접어들며 세속 구어로는 각자의 언어를 쓰면서도 보편 문어로는 제국의 언어를 써온 ‘중세적 언어 상황’이 해체되고, 민족어를 중심으로 말과 글을 정비하려는 상황이 찾아온다. 이처럼 언어적 근대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읽고 쓸 수 있는 ‘균질적 단일언어’를 창출하는 데 힘쓰게 되는데, 이는 동전의 양면처럼 “해당 공동체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각종 소수어나 방언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운동이나 정책”으로 흐르기도 한다. 이런 인식을 바탕에 깔고, 지은이는 우리말 표기법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논쟁과 거기에 담긴 사상을 들여다본다.

통일안은 주시경(1876~1914)과 그 제자들이 주도했던 일련의 흐름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외국인에게 우리말을 가르친 경험이 있던 주시경은 “비모어 화자라는 ‘타자의 시선’에서 우리말을 바라볼 기회”를 가졌고, <국문문법>(1905)을 통해 자신이 구상한 표기법을 처음 제시했다. 그가 제시한 표기법의 핵심은 ‘본음, 원체, 법식’에 따르는 것인데, 이때 ‘본음’이란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그리하여 귀로 들을 수 있는 구체적인 소리가 아니라 추상적인 층위에 있는 그러한 소리”였다. 이를테면 “맡아”를 소리 나는 대로 쓰면 음운의 변동에 따라 “마타”가 되지만, 추상적 층위에 있는 원래의 모습을 살려주기 위해선 “맡아”로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까지 종성으로 쓰고 있지 않던 ㅌ, ㅍ, ㅈ, ㅎ 등을 종성에도 써야 한다는 주장 등도 역시 같은 원칙 아래에 놓인다.

조선어학회가 1933년 10월29일(당시의 한글날) 완성해 발표한 ‘한글 마춤법 통일안’.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누리집
조선어학회가 1933년 10월29일(당시의 한글날) 완성해 발표한 ‘한글 마춤법 통일안’.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누리집

사실 언어적 근대의 초창기에 주로 논의되던 것은 중세적인 이중언어 상황을 ‘언문일치’로 해체하는 것, 그러니까 ‘역사적 표기’와 ‘표음적 표기’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를테면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는 아래아(ᆞ)의 사용, 천지(天地)를 예전 발음을 살려 “텬디”로 쓸 것인가 아니면 당시 발음에 맞춰 “천지”로 쓸 것인가 등 한자어의 표기 등이 그 핵심에 있었다. 통일안에서 지금의 맞춤법까지, ‘소리대로’가 원칙의 가장 앞에 위치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제로 발음되지 않는 글자를 써야 한다는 조선어학회의 주장은 매우 낯선 것이었고, 박승빈이 주도한 조선어학연구회(1931년 창립) 등 일부 지식인들로부터 “실제에 없는 것을 억지로 끌어와 강요한다”는 반발을 샀다. 예컨대 “먹으니”를 “먹+으니”로 본 조선어학회와 달리, 조선어학연구회는 “머그+니”로 주장했다. 이는 앞선 ‘소리대로’와는 또 다른, ‘어법에 맞춰’ 쓴다는 문제를 새롭게 제기했다. “조선어학회와 조선어학연구회의 대립은 ‘어법’에 맞는 표기를 통해 ‘표의화’를 지향하는 쪽과 표음문자인 한글을 사용해 가급적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구현하고자 했던 쪽의 갈등”이었다. ‘한자 훈독식’ 표기에 뿌리를 대고 있던 조선어학연구회 쪽과 달리, ‘한글 전용’을 전제하는 조선어학회 쪽에선 한글로 쓰더라도 그 뜻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표음문자를 표의화하는 것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주시경이 &lt;국어문법&gt;(1910)에서 제시한 우리말 문장 구조. 현실발화에서는 구체적으로 발음되지 않는 본음을 분별해내는 작업을 통해 ‘언어적 근대’의 길을 열었다. 뿌리와이파리 제공
주시경이 <국어문법>(1910)에서 제시한 우리말 문장 구조. 현실발화에서는 구체적으로 발음되지 않는 본음을 분별해내는 작업을 통해 ‘언어적 근대’의 길을 열었다. 뿌리와이파리 제공

‘일제가 조선어를 말살하려 했다’는 통념과 달리, 지은이는 민간 차원에서 전문가 그룹이 주도한 논쟁이 식민지 국가권력으로 하여금 표기법 정비에 나서도록 견인한 측면이 크다고 본다. 조선총독부는 세 차례의 ‘언문철자법’ 제정으로 민간에서의 논의를 공식화했고, 조선어학회가 내놓은 통일안도 이런 선행 작업들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통일안은 최현배가 제기한 ‘용언의 활용’ 개념을 도입하면서 이전 논의들보다 진전할 수 있었다. 예컨대 ‘어법에 맞춰’ 쓰려면, “덥다”의 변형으로 [더우니]로 발음되는 것도 “덥으니”라고 적어야 하는 난점이 생긴다. 이에 대해 “용언의 어간과 어미가 결합할 때 불규칙 활용을 하면 어간과 어미가 변한 대로 적는다”는 새 이론적 근거가 제공된 것이다. 이처럼 쓰기엔 어렵지만 진보적인 과학의 모습을 앞세운 통일안은, 쓰기엔 쉽지만 전통과 봉건적 보수성에 기댄 조선어학연구회의 표기법보다 더 큰 지지를 받아 오늘에 이르게 된다.

지은이는 이처럼 우리말이 근대의 언어로 주조되는 과정을 촘촘하게 톺아보는 한편, 이렇게 만들어진 ‘국어’를 성찰적으로 돌아봐야 할 과제도 제시한다. 추상적 층위에서 균질적 단일언어를 만드는 것은 “현실발화에서 손쉽게 발견되는 계층과 지역, 세대와 젠더에 따른 수많은 변이와 변종”을 지워버렸기에 가능했다. “‘하나의 언어’에 서로 다른 이질적인 복수의 규범을 인정하여 결과적으로 비균질적인 언어로 구성되는 ‘국어사전’과 ‘국어문법’을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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