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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언어 너머의 넓은 우주, 김훈, 저만치 혼자서

등록 2022-10-21 05:00수정 2022-10-21 09:52

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음 l 문학동네(2022)

형식과 관습이라면 무조건 배척했던 시절이 있었다. 일의 핵심과 상관없어 보이는 절차, 사람 간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행해지는 의례, 특정 물건에 의미를 부여해 대단한 가치 있는 무엇인 양 호들갑을 떨어대는 관례에 질색했다. 일만 잘하면 되지, 의지만 있으면 되지, 겉으로 드러내는 형식과 물건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 그 말에 서린 그 사람의 의지라고 생각했다. 다른 것은 모두 사족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했다.

‘어른’이 돼가면서 생각이 변했다. 어른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런 생각에 타격이 가해지는 순간의 연속과도 같았다. 눈을 맞추며 약속의 말을 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자신이 내보냈던 말을 기억하지 못했고, 그 사람의 입에서 약속에 대한 부인의 말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 말에 담겨 있던 그 사람의 의지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니어서, 내가 진심을 담아 말하던 순간에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정반대되는 다른 열망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경악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그럴 때마다, 펄쩍펄쩍 뛰었다. 세상에서 그런 일을 겪는 것이 오직 나 혼자뿐인 것처럼. 그때마다 배신감을 안겨준 상대를 원망했다. 나 자신을 책망했다. 이번에만 예외적으로 그런 일을 겪은 것이고, 앞으로는 겪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평안을 얻고자 했다.

수없이 많은 만남과 이별, 원망과 회한, 그리움을 지나간 다음에야 알게 됐다. 그것이 내가 만난 몇몇, 혹은 ‘나’라는 특수한 개인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님을. 본시 사람, 사람의 말, 사람의 의지는 끊임없이 흘러다니는 유동체라는 사실을. 사람이란 수많은 우연 위에 떠 있는 작은 미물이며,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사람이라는 미물을 이루는 수많은 요소들의 극히 작은 일부에 불과할 뿐임을.

그런 깨달음에 이르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말보다, 그 말을 하는 이의 눈빛이 먼저 다가왔다. 말의 내용보다 말을 하면서 그 사람이 만들어내는 몸짓이, 말을 실어 보내는 그 사람의 음성이, 말과 함께 보내오는 은근한 미소가, 커다란 의미가 되어 감겨왔다. 인류가 대대로 이어온 관습과 형식, 의례에 담긴 의미도 그제야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언어 너머에 더 넓은 우주가 있다는 것을, 그 우주에는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이어주는 오래된 묵계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다.

김훈의 소설을 읽는 것은 그런 우주와 만나는 일이다. 그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언어와 의지를 넘어선 세상에서 묵묵히 존재하던 사물, 동식물, 우연, 관습, 생사의 찰나들이 조용히 엄습해오는 순간을 맞게 된다. <저만치 혼자서>는 김훈이 그렸던 언어 너머의 세계들 중 가장 건조한 방식으로 주조된 세계이다. 인간의 정념과 의지를 모두 짜내어 제거해버린 건조한 캔버스에 은은하게 무르익어가는 낙조의 찰나를 그려 넣은 듯한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살아오는 내내 외면하거나 부정하거나 깜짝 놀라며 들여다보았던 어떤 핵심, 어떤 비밀에 성큼 다가서는 느낌이 든다.

정아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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