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베 디틀레우센 지음, 서제인 옮김 l 을유문화사(2022) 어린 시절은 관(棺)처럼 좁고 길어서, 누구도 혼자 힘으로는 거기서 나갈 수 없다(46쪽). 당신은 당신의 어린 시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나쁜 냄새처럼 몸에 달라붙는다(47쪽). 어린 시절은 캄캄한, 지하실에 갇힌 채 잊혀 버린 작은 동물처럼 언제나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51쪽). 우리는 어디로 방향을 틀더라도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과 맞부딪히고, 그 단단하고 뾰족한 모서리 때문에 스스로 상처를 입는다(53쪽). ‘어린 시절’에 관한 이토록 서늘하고 가차 없는 정의로 가득한 이 책은 20세기 덴마크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 토베 디틀레우센의 회고록인 ‘코펜하겐 3부작’의 제1권이다. 출간 50년 만에 세계 문학계의 주목을 받은 이 솔직한 회고록은 양차 대전 사이의 불안하고 궁핍한 유럽의 노동계급 가정에서 어린 여성으로 유년기를 보내는 게 어떤 일인지 지독하리만큼 냉정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난로처럼 커다랗고 시커멓고 나이가 많은 화부 아버지는 책을 읽는 사회주의자고 책 읽는 사람은 이상해진다고 믿는 어머니는 스스로 읽고 쓰기를 깨우친 어린 딸 토베가 학교에 가면 책을 읽는다는 이유로 엄청 맞고 다닐 거라고 단언한다. 어머니는 딸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벌을 주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대체로는 자기 마음대로 부당하게 딸을 자주, 그리고 심하게 때렸다. 어머니는 딸의 거짓말을 알아챈 적은 거의 없으면서 진실은 거의 믿는 법이 없었다. 어린 토베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이런 어머니의 성격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보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수수께끼 같으면서도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남았고 작가 토베의 내면에도 평생 분노와 슬픔과 연민이 뒤섞인 혼돈을 채워놓았다. 어머니와 달리 책을 읽는 아버지는 막심 고리키의 작품에서 발견한 ‘비탄’이라는 단어의 뜻을 묻는 딸에게 “고통과 비참함과 슬픔을 뜻하는 말이란다. 고리키는 위대한 시인이었지”라고 다정하게 대답해주지만, “나도 시인이 되고 싶어요!”라고 기쁘게 말하는 딸에게 엄한 목소리로 “바보 같은 소리! 여자는 시인이 될 수 없어!”라는 상처의 말을 안기기도 하는 양가적 인물이다. 어느새 삶보다 죽음을 더 많이 생각하며 죽음을 친구로 여기게 된 사춘기의 토베는 오직 시에서만 실낱같은 위로를 발견하고 비밀 노트에 시를 적어 숨기는 일로 폐허 같은 어린 시절의 막바지를 견딘다. 그동안 쓴 시를 들고 신문사를 찾아갔다가 편집자에게 거절당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토베는 생각한다. 자신의 시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지만, 누구도 자신의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시를 써야만 한다고. 작가는 어린 시절을 벗어던진 뒤에야 비로소 그것을 차분히 바라볼 수 있고 마치 극복한 병처럼 그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냉정하고 초연한 시선으로 기술된 이 책은 분명 폐허를 견뎌낸 한 여성 작가의 탄생기지만,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저마다의 어린 시절을 만나게 된다. 그 조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그러한 만남의 성사가 50년이라는 세월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당도한 낯선 작가의 익숙한 이야기가 품고 있는 가장 큰 가치라고 말하고 싶다. 이주혜/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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