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알레 일레와 교수(왼쪽)가 지난 23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최인훈 작가의 서재에서 작가의 아들인 음악평론가 최윤구씨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책상 위에 놓인 원고는 <광장> 개정판과 희곡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의 친필 원고다. 최재봉 선임기자
최인훈 소설 <광장>이 아랍어로 번역 출간된다. 한반도 분단과 이념 대립, 전쟁의 상흔을 그린 1961년 작 <광장>은 한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반세기 넘게 꾸준히 읽혀왔다. 이 소설에 대한 관심은 나라 밖으로도 이어져 그동안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광장>의 일곱번째 번역본이 될 아랍어 번역은 이집트 카이로 아인샴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에서 한국 문학을 가르치는 알레 일레와 교수가 역시 이집트인인 동료 번역가 마르와 자흐란과 함께 맡았다. 아랍어본 <광장>은 번역문학 전문 출판사인 이집트 스프사파 출판사에서 올 연말이나 내년 초에 나올 예정이다. 일레와 교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최 학술행사 참여차 방한한 길에 23일 오후 최인훈의 경기도 고양시 화정 자택을 방문해 작가의 유족을 만났다.
“<광장>을 처음 접한 건 아인샴스대학 한국어문학과 학부생 시절 한국 문학사 수업에서였어요. 김수영의 시 ‘풀’과 함께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었죠. 그때는 작품 전체를 읽은 건 아니었고, 작품 일부와 줄거리만 보았지만요. 주인공 이명준이 전쟁 뒤 포로 석방 심문 때 ‘중립국’이라는 말만 거듭 반복하는 부분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반도의 분단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 대목을 읽으면서 아픈 역사를 느끼게 되었어요.”
<광장>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알레 일레와 교수가 지난 23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고 최인훈 작가의 자택 거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일레와 교수는 중동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생긴 아인샴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의 제2회 졸업생. 졸업 뒤 한국으로 유학을 와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소설 전공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논문 주제는 1960년대 한국과 이집트 문학 원작 영화에 나타난 지식인상 비교 연구. 박사 학위 취득 직후인 2020년 9월 모교인 아인샴스대학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부임한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오래 꿈꾸어왔던 <광장> 번역에 착수했다. 다행히 한국문학번역원의 번역 출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광장>을 처음 완독한 건 한국에서 석사 과정을 할 때였어요. 그때가 마침 ‘아랍의 봄’이라는 아랍 세계의 민주화운동 시기여서, <광장>에 그려진 지식인의 괴로움이 마음에 많이 와닿았지요. 한 사회에 살면서 자기가 생각하는 거랑 사회가 생각하는 거랑 부딪칠 때 겪는 고통에 주목해서 읽게 되었어요. 그래서 소설이 더 다가왔던 것 같아요.”
일레와 교수는 “아랍 독자들 역시 분단이라는 (한국에 특수한) 상황보다는 한 젊은 사람이 역사적 시간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괴로움,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로 인한 개인의 아픔에 주목해서 작품을 읽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광장>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주인공 이명준을 자살하게 만든 결말이 미웠어요. ‘좀 살려주지’ 하는 마음이 들었지요. 그런데 지금 생각은, 이명준이 정말 아팠겠다 싶어요. 이명준이 중립국행을 택한 건 남과 북에서 겪은 모든 경험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인훈 작가의 아들인 음악평론가 최윤구씨가 “이명준을 죽게 했다는 데에 대해 아버님도 평생 동안 죄책감을 지니고 계셨다”고 거들었다. 그러자 일레와 교수는 “그때 그 상황을 보면, 이명준을 죽게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독자로서 저도 마음이 아프지만, 지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본다”고 받았다.
일레와 교수 자신이 논문 작성을 위해 최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랍어로 번역된 한국 문학 작품은 모두 54권이고 그 가운데 70% 정도가 이집트에서 나왔다. <광장>을 펴내는 스프사파 출판사는 그동안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과 강경애의 소설 <소금> 등 한국 문학 작품을 여럿 내놓았다.
이집트 스프사파 출판사에서 나온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왼쪽)과 강경애의 소설 <소금> 아랍어본. 최재봉 선임기자
“아랍의 한국 문학 독자는 대부분 한국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입니다. 한국 문학 작품을 내는 아랍 출판사는 대체로 소규모라서 초판은 1천부를 찍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제 제자가 번역한 <82년생 김지영>은 드물게 2쇄를 찍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한국 문학 작품의 아랍어 번역은 직역보다는 중역인 경우가 많았어요. 저도 <광장>을 번역하면서 영어판을 참고하는데, 한 대목을 몽땅 건너뛰거나 대사를 지문으로 바꿔서 옮긴 경우도 보이더군요. 번역가와 번역 작품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레와 교수는 “<광장>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힘들다고 느꼈던 건, 번역 허락을 받는 일이었다. 번역을 처음 하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더라. 그리고 한국 문학 작품을 번역 출간하는 출판사들은 소규모라 홍보와 유통에 어려움이 많다. 한국 정부나 한국문학번역원 같은 기관들이 그런 부분에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제 교류와 한류의 영향 덕분에 아랍권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학의 장래는 밝은 편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아인샴스대학교 한국어문학과의 인기는 매우 높습니다. 제가 입학할 때는 일본어과가 한국어과보다 인기가 많고 점수도 높았는데, 지금은 한국어문학과가 일본어과보다 인기가 많은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한국 노래를 듣고 한국 드라마를 본 덕분에 입학하기도 전에 이미 한국어를 읽고 말할 줄 아는 학생들도 많아졌어요. 졸업생들은 번역과 통역 일을 하거나 한국어 교사로 일하기도 하고 한국 회사나 한국 관련 회사에 취직하기도 합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