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턴테이블 위의 영혼들
힙합으로 본 흑인운동의 결정적 장면
박형주 지음 l 나름북스 l 1만7000원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 행동으로 사망한 사건으로 미국 전역에서 인종주의 반대 목소리가 터져 나오던 2020년 6월 말, 베테랑 힙합 그룹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는 자신들의 대표곡 ‘파이트 더 파워’(Fight the Power)를 31년 만에 새로 ‘리믹스’해 발표했다. 자히(Jahi), 나스(Nas), 블랙 소트(Black Thought), 와이지(YG), 랩소디(Rapsody) 등 여러 뮤지션들이 함께 참여한 이 곡은 힙합 음악이 얼마나 풍부한 문화적·역사적·사상적 자원들을 품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래퍼들은 블랙팬서당과 프레드 햄프턴, 19세기 초 아이티의 영웅 투생 루베르튀르와 장자크 데살린, 미국의 애국주의에 저항했던 농구선수 크레이그 호지스와 마흐무드 압둘라우프, 맬컴 엑스와 마틴 루서 킹의 암살 사건 등 흑인운동의 다양한 유산들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끌어와 2020년 투쟁과 연결시켰다. 퍼블릭 에너미의 래퍼 척 디(Chuck D)는 원곡의 가사를 그대로 사용했는데, 이는 “미국의 인종주의가 31년 전과 마찬가지로 강고하며,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 새로운 말을 보탤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래픽 장은영 soobin35@hani.co.kr, 게티이미지뱅크
애초 힙합은 1970년대 미국에서 파티의 흥을 돋우기 위한 음악으로 출발했다. “가난한 흑인들이 거리에서 사회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던 것이 랩과 힙합의 기원”, “힙합은 본질적으로 사회 비판적인 예술” 같은 인식은 사실과 다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다른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힙합에도 정치와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을 심도 있게 발전시킨 흐름이 있었고, 그 뒤엔 “급진적 흑인운동”의 전통이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현대사 연구자 박형주가 쓴 책 <검은 턴테이블 위의 영혼들>은 힙합 음악에 새겨져 있는 다양한 흔적들을 따라 20세기 이후 급진적 흑인운동에 투신한 인물과 사건들을 들여다본다. 마틴 루서 킹과 맬컴 엑스처럼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부터, 폴 로브슨과 해리 벨라폰테, 로레인 한스베리, 프레드 햄프턴과 휴이 뉴턴 등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과 국제적·역사적 사건들까지 폭넓게 아우른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자 윌리엄 에드워드 버가트 듀보이스. 힙합 음악가 나스(Nas)는 2015년 하버드대학에서 아프리카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학 및 사상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듀보이스 메달’을 받은 바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흑인 민족주의 운동의 선구자였던 마커스 가비. 해운회사‘블랙스타라인’을 출범시켜 아프리카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먼저 힙합의 두 가지 특성을 새겨둔다. 하나는 “힙합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를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공공주택의 낙후된 주거환경, 경찰의 폭력과 일상적인 인종차별, 값싼 마약의 유행이 낳은 폐해, 일상적인 교도소 수감 경험 등”은 그 공동체가 마주한 특유의 문제였고, 힙합은 여기에 대응하고자 한 예술이라는 것이다. 총격에 숨진 이를 추모하는 힙합 곡이 그렇게 많은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힙합이 과거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작법을 가진다”는 점이다. 디제이가 ‘샘플링’을 하듯 래퍼들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과거의 유산들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는데, 이런 특성 덕분에 우리는 힙합 음악에서 20세기를 관통하는 수많은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있다.
급진적 흑인운동이란 뿌리 깊은 인종차별 등 “흑인을 억압하는 체제와 타협하지 않고 맞선 운동”을 넓게 포괄한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는 처음 박사학위를 받은 듀보이스(1868~1963)는 뛰어난 학자였을 뿐 아니라 한평생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에 맞선 운동가였다. 시민권 운동가로 출발해 점차 범아프리카주의자, 사회주의자로 나아갔던 그의 선구적인 일생은 급진적 흑인운동의 다양한 경로들을 보여준다. 루페 피아스코(Lupe Fiasco)는 자신의 가사에서 차별과 억압이 없는 미국을 그리며 그 헌법을 쓴 이가 듀보이스라 상상했다. “래퍼가 되고 싶으면 맬컴, 가비, 휴이를 공부해”란 데드 프레즈(Dead Prez)의 가사에서 보듯, 맬컴 엑스(1925~1965), 마커스 가비(1887~1940), 휴이 뉴턴(1942~1989)은 힙합 가사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세 사람이다. 각자의 길은 달랐지만, 이들은 평생 또는 한때 강력하게 ‘흑인 민족주의’ 노선을 제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급진적 흑인운동에는 ‘인종적 단결’을 강조하는 경향과 ‘민중의 단결’을 강조하는 경향이 공존했으며, 개별 운동가들의 노선 역시 대체로 그러했다.
폴 로브슨이 뉴욕에서 발행했던 흑인 좌파 신문 <프리덤>. 듀보이스 등이 주요 기고자였으며, 로레인 한스베리도 여기서 일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1970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발행한 앤절라 데이비스 수배 전단. 적용된 혐의는 납치와 살인이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흑인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인 데이비스는 여성비하 같은 힙합의 부정적 모습에 대단히 비판적이지만, 한편으로 힙합 음악인들이 문화 정치 영역에서 벌이는 싸움의 가치를 인정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여기에는 수없이 많은 연결고리가 있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1950년대 배우와 가수로 활약했던 폴 로브슨(1898~1976)은 듀보이스와 범아프리카주의 운동을 함께했고, 뉴욕에서 좌파 신문 <프리덤>을 발행해 정부로부터 여권 발급을 금지당하는 등의 고초를 겪었다. 역시 배우이자 가수로서 한평생 적극적으로 정치·사회적 발언을 했던 해리 벨라폰테(1927~)는 로브슨을 ‘롤모델’로 삼았다. <프리덤>에서 일을 했던 로레인 한스베리(1930~1965)는 흑인 가족의 절망적인 경험과 투쟁을 담은 희곡 <태양 속의 건포도>를 썼다. ‘태양 속의 건포도’란 제목은 미국을 대표하는 흑인 작가 랭스턴 휴스(1901~1967)가 자신의 시 ‘할렘’에서 미국 사회 속 흑인들의 비참한 존재 조건을 ‘태양 속의 건포도’로 비유한 데에서 따온 것이다. 로레인의 친구 니나 시몬이 그에게 바친 곡 ‘영, 기프티드 앤드 블랙’(Young, Gifted and Black)은 시민권 운동을 대표하는 노래가 되었을 뿐 아니라, 힙합에서도 수없이 많이 샘플링·인용됐다.
베트남 국부 호찌민은 뉴욕 체류 시절 마커스 가비의 강의를 경청했고, 1967년 미국에서 온 한 흑인 학생운동가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민권 운동의 무력함에 지쳤던 이 학생운동가는 범아프리카주의로 나아가 휴이 뉴턴 등이 만든 ‘블랙팬서당’(1966년 창당)에서도 활동하다, 나중에는 아프리카 신생국 기니로 가 ‘콰메 투레’(1941~1998)란 이름의 혁명가로 살았다. 블랙팬서 여성 당원 아페니 샤쿠르는 뉴욕의 경찰서를 폭파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임신한 상태로 법정 투쟁을 벌였는데, 그 배 속에 있던 아이가 1990년대를 대표하는 래퍼 가운데 한 명인 투팍(2PAC)이다.
힙합 음악가 와이지(YG)가 조지 플로이드 사건을 계기로 만든 곡 ‘에프티피’(FTP·‘경찰 X까’)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유튜브 갈무리
차별과 억압에 맞선다는 문화적 전통이 폭력과 마약으로, 여성혐오로, 반유대주의로, 지나친 상업화로 나아간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다만 지은이는 “미국에서 흑인 남성이 교도소에 가장 많이 가는 인구 집단인 현실을 지적하지 않고서는 랩이 마약과 폭력을 이야기하고 경찰을 적대시하는 반사회적 문화라는 비판을 반박할 수 없다”고 말한다. 리처드 너새니얼 라이트가 쓴 소설 <미국의 아들>(1940)에는 어떤 꿈과 희망도 없이 살다 살인과 같은 일탈행위를 통해 처음으로 자유로움과 성취감을 느끼는 주인공 ‘비거’가 등장한다. “라이트는 어려서부터 목격한 수많은 실제 비거들을 바탕으로 이 주인공을 창조”했는데, “긴장감과 소외감, 자기혐오를 느끼며 그 스트레스를 공격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욕구로 드러내”는 이 비거의 모습은 힙합 음악뿐 아니라 지금의 현실에서도 여전하다.
지은이는 다만 “힙합이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 특히 억압받는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 혁명을 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힙합 음악이 수없이 되새기고 또 되새기고 있는 ‘혁명적’ 인물들과 사건들은 이에 대해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힙합 페미니즘 운동과 여성혐오에 대한 반성, 폭력과 인종주의에 대한 성찰과 사과 등 힙합 스스로 더 나아질 수 있는 핵심 자원이 되고 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