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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진리의 이념 속에서 인간은 불멸자가 된다”

등록 2022-11-18 05:00수정 2022-11-18 09:31

프랑스 급진 철학자 알랭 바디우
‘세계의 논리’ 선명한 자기 해설

도덕주의 설교 당대 철학에 맞서
‘사건 통한 진리 주체 형성’ 갈파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선언
알랭 바디우 지음, 박성훈 옮김, 서용순 감수 l 길 l 1만8000원

모로코 출신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85)는 존재·진리·주체 같은 고전적 개념을 거점으로 삼아 플라톤주의 철학을 오늘의 철학으로 되살려내려 하는 사유의 고전주의자다. 그런가 하면 진즉 사멸한 것으로 취급받는 공산주의를 무덤에서 불러내 새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하는 정치적 급진주의자이기도 하다. 가장 고전적인 언어로 가장 급진적인 사유를 감행하는 철학자가 바디우다. 2009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선언>은 이 급진 철학자의 사상 구도를 간명하게 살펴볼 수 있는 저작이다.

이 책은 그 20년 전 출간한 <철학을 위한 선언>(1989)과 나란히 놓고 볼 때 그 성격이 분명해진다. ‘두 번째 선언’은 ‘첫 번째 선언’의 속편인 셈이다. 또 이 두 편의 선언문은 바디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존재와 사건>(1988)과 <세계의 논리>(2006)의 자매편이라는 성격을 띤다. <철학을 위한 선언>이 <존재와 사건>을 해설하고 보충하며 그 철학적·정치적 함의를 선언의 형식으로 내놓은 책이라면,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선언>은 <세계의 논리>에 대해 같은 구실을 하는 선언문이다. <존재와 사건>과 <철학을 위한 선언>, <세계의 논리>와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선언>이 각각 세트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선언문을 이해하려면, 앞서 출간된 <존재와 사건>과 <세계의 논리>를 머릿속에 그림으로 그려 두어야 한다. <존재와 사건>은 ‘사건’이라는 바디우의 고유한 개념을 중심에 놓고 존재론을 펼치는 저작이다. 또 <존재와 사건> 제2권으로 나온 <세계의 논리>는 그 존재론을 바탕에 깔고 ‘사건’을 통해 ‘진리’가 출현하는 양상에 주목하는 저작이다. 이 주요 저작들에 이어 쓴 두 편의 ‘선언’은 ‘선언’이라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당대 현실에 개입해 발언하려는 실천적 의도를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저작이다. 두 선언문 가운데 ‘첫 번째 선언’은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던 시점(1989)에 프랑스를 휩쓸던 탈근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에 맞서 철학의 임무를 환기시키려는 저작이다. 탈근대 철학이 ‘철학의 죽음’과 ‘진리의 죽음’을 유포하던 그 시기에 바디우는 철학이 죽지 않았으며 진리도 살아 있다고 단언한다. 그렇다고 해서 옛 진리를 무조건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바디우는 진리가 플라톤이 생각했던 대로 ‘하나(일자)의 진리’인 것이 아니라 ‘여럿(다수)의 진리’로 존재하며, 그 진리들이 하늘에서 강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내부의 존재 영역에서 창출된다고 말한다. 이때 진리가 창출되는 영역으로 바디우가 제시하는 것이 정치·과학·예술·사랑이라는 영역이다. 이 영역마다 각각의 진리가 사건을 통해 출현한다는 것이다.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선언>은 이 첫 번째 선언의 논의를 이어받되, 그 20년 사이에 변화한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 상황에 대응한다. 바디우가 보기에, 철학은 여전히 ‘실존의 위기’를 겪고 있으나 그 위기의 양상은 아주 달라졌다. 20년 전에 철학의 위기는 ‘철학은 죽었다’는 주장으로 나타났지만, 오늘의 경우에는 철학이 도처에서 넘쳐나는 방식으로 위기를 겪는다. 철학은 카페와 클럽과 미디어를 비롯한 온갖 곳에서 성행한다. 이런 과잉이 철학의 위기를 방증한다. 왜 그런가? 거기서 오고 가는 철학은 철학의 본질을 배반한 철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극히 안온한 도덕주의를 설교하는 철학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바디우에게 특히 거북하게 다가오는 것은 ‘인권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방어하고 부르주아 의회 민주주의를 변호하는 철학이다. 이 철학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삼아, 서구에 동조하지 않는 지역을 부정하고 침탈하는 제국주의 행태에 도덕적 정당성의 성수를 뿌려준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한 철학자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공산주의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프랑스 급진 철학자 알랭 바디우. 위키미디어 코먼스
공산주의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프랑스 급진 철학자 알랭 바디우. 위키미디어 코먼스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선언>은 바디우 자신의 철학적 비전을 명료히 드러냄으로써 이런 반동의 물결에 맞서고자 한다. 이 철학적 비전은 ‘의견’에서 시작해 ‘주체’와 ‘이념’으로 끝나는 여덟 가지 개념의 사슬을 거쳐 분명해진다. 바디우가 출발점에서 검토하는 ‘의견’(opinion)이란 오늘날 정치 영역에서 지배권을 휘두르는 ‘여론’(opinion publique)을 가리킨다. 이른바 민주주의자들은 의견 곧 여론을 모든 정치 행위의 근거로 내세운다. ‘우리는 여론에 반해 정치하지 않는다’는 말이 이 민주주의자들이 섬기는 금과옥조다. 플라톤주의자답게 바디우는 의견이 진리에 대립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여론이 지배하는 곳에는 ‘다수의 주장’ 말고는 어떤 근본적 원칙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유럽에서 난민 입국을 거부하는 극우정당이 여론의 힘으로 지배권을 얻는 것이야말로 진리 없는 여론정치의 실상을 보여준다.

바디우에게 진리는 이런 여론의 지배를 깨뜨리는 사건과 함께 출현한다. 어떤 사태가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이 되려면 ‘실존의 최댓값’을 얻어야 한다. 요컨대 사건이란 기존의 지배적 질서를 돌연히 뚫고 나와 새로운 보편성을 창출하는 사태를 뜻한다. 바디우는 이런 사건의 정치적 사례로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68혁명 같은 시대를 바꾸는 격변을 든다. 진리란 이런 사건을 통해 출현하는 보편성의 빛이다. 그 진리는 언제나 세계 내부의 몸체에 깃드는데, 이를테면 혁명집단이나 혁명정당이 그런 몸체에 해당한다. 이 진리의 몸체에 다른 몸체가 연결될 때 ‘주체화’가 이루어진다. 쉽게 말해서 개인들이 혁명집단이라는 진리의 몸체에 합류해 들어갈 때 개인의 차원을 넘어 진리의 주체가 된다.

개인이 이렇게 진리의 몸체에 참여해 진리의 주체로 일어서려면 그 개인 내부에 이념이 들어서야 한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 곧 가장 완전하고 가장 아름다운 이상을 마음에 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이상을 품고서 진리의 주체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켜 바디우는 ‘이념화’(idéation)라고 부른다. 이렇게 자신을 주체로 일으켜 이념의 빛을 따라 나아가는 삶이 참된 삶이다. 이 영원한 진리의 이념 속에 머묾으로써 인간은 ‘불멸자’가 된다고 바디우는 말한다. 이념을 따르는 삶이 우리를 불멸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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