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출신으로 생물정보학 분야에서 과학자로 일하고 있는 카밀라 팡. 여덟살 때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스물여섯살에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진단받았다. ⓒGreg Barker. 푸른숲 제공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삶, 사랑, 관계에 닿기 위한 자폐인 과학자의 인간 탐구기
카밀라 팡 지음, 김보은 옮김 l 푸른숲 l 1만8800원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 개념은 자폐스펙트럼, 주의력결핍과잉행동 등 과거 ‘정상이 아닌 것’으로 치부했던 인간의 뇌신경적 특성들을 ‘다양한 것’으로 인식하게 해주는 문을 열었다. 우리는 ‘신경정형성’만이 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뇌신경적 회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점차 나아가고 있다. 과거 우리 사회가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았던 ‘신경다양인’들의 다채로운 경험과 생각들은 우리 모두가 함께 서 있는 세계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앞장서고 있으며, 최근 들어 쏟아져 나오는 신경다양인 당사자의 책들이 바로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전형성에 갇힌 우리를 다양성으로 안내하는 것, 그것은 과학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영국 출신으로 생물정보학 분야에서 과학자로 일하고 있는 카밀라 팡(31)의 첫 책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원저 2020년 출간)은 여덟 살 때 자폐스펙트럼장애(아스퍼거증후군)를, 스물여섯 살에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를 진단받은 지은이의 ‘인간 탐구기’(원제 ‘Explaining Humans’)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엉뚱한 행성에 착륙한 게 틀림없다’고 여겼던 지은이에게, 인간 존재는 늘 모호하고 모순적이고 불확실했으며 인간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는 외국어처럼 습득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이런 그에게 명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과학은 “잠겨 있는 세상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이 책은 지은이가 과학이란 도구를 활용해 인간 존재를 탐구해온 결과물이다. “나의 신경다양성은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와 관련된 질문을 수없이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그 질문들에 답할 능력도 주었다.” 자폐스펙트럼장애는 지은이가 세상을 편견 없이 ‘다르게’ 바라보도록, 불안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는 빠르게 정보를 처리하고 머릿속에서 온갖 결과를 그려보게 해주었다.
카밀라 팡은 다양한 유형의 단백질들이 공존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인간관계의 길잡이로 삼았다.
자폐스펙트럼장애로 극단적으로 강화된 공포를 느꼈던 카밀라 팡은 프리즘을 통과하는 빛의 굴절 현상으로부터 두려움을 이해하고 범주화하려 시도했다.
책은 기본적으로 과학 정보로부터 삶의 지침을 이끌어내는 ‘과학 에세이’의 결을 띤다. 다만 전형성에 포획되지 않는 신경다양인 고유의 경험과 생각이 과학을 경유해 인간을 이해하려 하는 시도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예컨대, 지은이는 어린 시절부터 다르다는 이유로 또래 집단과 어울리지 못했고 대신 그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그들의 행동 모델을 탐구했다. 지은이가 ‘애정하는’ 단백질은 이런 탐구와 깨달음의 바탕에 있다. 단백질은 모든 생물화학의 기본 요소로서, 인간 성격 유형 분류(MBTI)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수용체·연결체·키나아제·핵 단백질 등 다양한 종류로 분화하여 저마다의 기능을 수행한다. “단백질에서 배울 가장 중요한 교훈은 타인과 더 원활하게 상호작용하고 일하는 방법”인데, “인간과 달리 단백질은 다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백질로부터 무리에 속하려는(균일성) 욕망보다 개개인의 차이와 개성이야말로 전체적인 ‘팀워크’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이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인간의 행동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인가 아니면 순응적인가?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어느 정도 확실하게 예상할 수 없으면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지은이에게, 군중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였다. 불확실한 군중의 움직임은 언제든 그를 ‘멜트다운’(통제력을 잃는 상태)으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분자동역학에서 ‘대중에 휩쓸리지 않는 법’을 찾아냈다. 액체나 기체 속 입자들이 무작위로 움직이는 방식을 설명하는 이론인 ‘브라운 운동’은 전체로서의 계(系)와 개별 입자의 움직임을 함께 파악하는 길을 열어줬다. 무엇보다 특정한 미시적 상태가 장기적으로 계의 어느 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에르고딕 이론’은 ‘평균’, ‘정상’, ‘균형’에 대한 협소한 규정을 깨게 해줬다. “전체 계를 볼 수 있다고 우기지만 사실 우리는 아주 작은 부분집합만을 흘낏 스쳐볼 뿐이다.” 전체 계는 개인 간의 모든 변동성을 포함하며, “나는 당신만큼이나 유의미한 표본의 일부다.”
카밀라 팡은 동역학의 근본인 파동으로부터 배운 공명과 간섭을 인간관계에도 적용한다.
카밀라 팡은 인공신경망의 피드백 체계로부터 자신의 기억을 다스리는 법을 찾았다.
다른 사람과 쉽게 연대감을 느끼지 못했던 지은이는 이런 탐구를 통해 친구 및 가족과의 공감이라는 유대감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집단과 개인이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을지 탐구한 지은이는 “이것(집단과 개인 사이의 어려움)은 맞서 싸우기보다는 수용해야 할 이중성”이라고 말한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며 내 개성을 지키는 동시에 내가 기여하고 혜택받을 수 있는 더 넓은 세상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집단에 참여하는 일은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것을 막지 않으며, 실제로는 내 존재와 경험, 내가 제공해야 할 것을 최대한 활용하게 한다.”
“아스퍼거증후군을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 생각과 공포가 눈 부신 빛처럼 달려드는 순간이 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경험하지만, 다양한 감정과 불안, 충동, 자극을 분리할 능력이 선천적으로 없기 때문이다. 그저 한덩어리의 빛처럼 공포를 느껴왔던 지은이는 ‘빛의 굴절’ 원리로부터 그것을 분리하고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프리즘으로 빛을 굴절시켜 보면 여러 색으로 나누어지듯, 자신을 프리즘처럼 투명하게 만들면 자신에게 한덩어리로 덮쳐오는 불안과 공포를 하나하나 나누고 각각에 맞는 상호작용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모두가 고유의 파동 패턴을 지녔다는 파동의 역학은 공명과 간섭을 통해 타인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게 도와준다. 하나의 본질로부터 수많은 다른 세포들로 분화하는 진화의 원리와 양자택일식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문제 해결의 답을 찾아내는 데 쓰이는 퍼지논리는 각각 ‘관찰에 근거한 공감’과 ‘논쟁을 통한 절충’을 가르쳐준다.
과학과 삶이 우리에게 주는 공통의 메시지는 “실패하는 실험을 즐기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누구든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그저 “더 나아지고,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복잡한 일에 더 능숙해”지고자 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 될 뿐이라고 말한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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