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누스바움의 <유대인 증명서를 쥔 자화상>(1943, 위)과 페미니스트 화가 윤석남이 그린 서경식의 초상(아래). 유대인 난민인 누스바움은 유대인 통행 금지 상황에서 신원 조회를 당하는 상황을 그림으로 그렸다. 서경식은 이 그림 옆에 서서 자신의 외국인등록증을 보여주는 모습을 영상에 담으려 했다. 연립서가 제공
서경식 다시 읽기 2
회상과 대화/최종 강의
하야오 다카노리·리행리·도베 히데아키 엮음, 김지영·신민정·최재혁 옮김 l 연립서가 l 2만2000원
“아비뇽에서 두번째로 베트남 사람과 맞닥뜨렸을 때는 상당히 어색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을 각오했다. 지금 나는 ‘난민’이 아니라 한국의 ‘국민’인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참정권이 없으니 반(半)난민 혹은 반국민이라고 불러야겠지만 말이다. (…) 그렇지만 나는 ‘한국인으로서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는 한국 정부가 발행하는 여권을 가지고 여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용병대장’이 발급한 여권 덕분에 나는 이 아비뇽에 올 수 있었다.”(<반난민의 위치에서>, 2002)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72)은 이런 글을 쓴 바 있다. 우카이 사토시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는 여기서 ‘반난민’이라는 개념, 아니 ‘사고의 자세’를 서경식이 품고 있는 어떤 고갱이로 주목한다. 일본에서 아무런 자격도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는 처지의 피차별자인 서경식은 왜 ‘난민’이 아니라 굳이 ‘반난민’을 자처하는가? 또 과거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 아무런 결정도 행사할 수 없었던 그는 어째서 굳이 ‘한국인으로서의 책임’을 지려 하는가?
<서경식 다시 읽기 2>는 서경식의 일본 도쿄경제대학 정년퇴임(2021년)을 기념하기 위해 동료들이 엮은 책이다. 권성우 등 18명의 필자가 참여해 지난해 출간됐던 <서경식 다시 읽기>가 한국에서 기획된 기념문집이라면, 이 책은 일본에서 기획된 일본어판 기념문집이다. 서경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도쿄경제대학 동료들이 나서서, 서경식의 최종 강의, 그가 참여했거나 그에 대한 인터뷰, 좌담, 정년퇴임 기념 심포지엄 등을 엮었다. ‘월경자’(디아스포라)를 기념하는 작업이다 보니 두 권 공히 경계를 넘어선 연대와 우정을 담고 있지만, 이 책에는 일본 사회 속 서경식은 어떤 존재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가 좀 더 두드러진다.
<서경식 다시 읽기 2>의 일본판 표지에 쓴 사진. 연립서가 제공
아사노 고지로가 촬영한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시 가이바마 해안에 쓰나미로 밀려든 폐기물>(2011). 연립서가 제공
하야오 다카노리는 서문에서 ‘서경식과 그의 시대’를 세 시기로 구분한다. 재일조선인 1.5세대인 서경식은 한국 유학 중이던 두 형(서승·서준식)이 정치범으로 체포된 뒤 석방 운동을 벌이며 일본의 리버럴·좌파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대사회적 발언을 시작(제1기)했다. 냉전 종식 뒤 ‘역사 인식 논쟁’이 벌어진 90년대부턴 일본의 식민지주의 책임을 희석하려는 “리버럴·좌파 계열의 ‘퇴락’”과 맞서 싸워야(제2기) 했다. 일본 리버럴의 퇴락은 ‘국가’와 함께 전체주의가 귀환하고 있는 오늘날의 흐름과 직결되는데, 서경식의 일관된 발언은 ‘전후 일본’이 결여하고 있는 핵심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묻는 불쏘시개였다. 서경식은 ‘국가주의가 문제’, ‘개인이 앞선다’ 등 보편주의를 말하면서도 식민지주의의 책임을 외면하는 리버럴의 태도에서 ‘타자 부재’를 지적해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들.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명예교수는 1997년 열린 ‘위안부’ 문제 관련 심포지엄에서 ‘일본인의 책임’이 언급되자, 우에노 지즈코가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 “국가의 법에 따라 종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국가주의와 뭐가 다른가” 말했던 일을 되새긴다. 가토 노리히로는 “아시아의 타자에게 사죄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국의 죽은 자’를 깊이 애도함으로써 ‘인격 분열’을 극복하고, ‘우리 일본인들’이라는 국민 주체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치다 다쓰루는 “원리적인 ‘옳음’을 추구하는 지향은 언젠가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분비하는 ‘악’과 조우할 수밖에 없다”며, 옳음(식민지주의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본 대다수 국민더러 ‘자살을 하라는 것이냐’ 되물었다. 국가주의에 반대한다며 “나는 우연히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일본인’(재일조선인을 빗댄 말)” 같은 언술까지 횡행했다.
일본의 화가 나카무라 쓰네의 <두개골을 든 자화상>(1923). 서경식은 중학생 시절 수학여행에서 이 작품을 대면한 뒤 ‘죽음이란 무엇일까’ 생각하며 예술에 빠져들었다 한다. 그는 “미술은 그 사람의 감각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까지 포함하여 나타내어” 준다고 말한다. 연립서가 제공
이것이 서경식이 싸워온 시대의 맨얼굴이다. ‘서경식 스쿨’의 일원을 자처하는 시부야 도모미 도쿄경제대학 준교수는 서경식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핵심을 두 가지로 꼽았다. “인간의 추악함을 놓치지 않는 통찰력”과 “리버럴리스트적인 정형 문구의 부정”이다. 서경식은 인간은 그 누구든 추악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예민하게 감각했으며, ‘반난민’을 자처하며 기꺼이 ‘책임’을 받아들이려 했던 태도에서 보듯 그 감각을 늘 자신에게도 향하려 했다. 그가 뒤쫓은 프리모 레비(1919~1987)처럼 ‘바’(bar)를, 곧 어떤 척도의 상한선을 높게 들려 한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말뿐인 보편주의’를 파헤친다. ‘재일일본인’이라 주장하는 어리광에 서경식은 이렇게 질타했다. “당신들이 오랫동안 식민지 지배에서 얻은 기득권과 일상생활에서 ‘국민’으로서의 특권을 내던지고, 지금 바로 여권을 찢어 자발적으로 난민이 되는 기개를 보여 주었을 때만, 그 말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타자’는 당신들을 ‘일본인’으로 계속 지목할 것이다.”(<일본 리버럴의 퇴락>, 2017)
서경식의 제3기는 2000년 도쿄경제대학 교수가 된 뒤로 교육자로서 젊은 세대에게 다양한 영향을 미친 시기다. “순해졌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하야오는 이 시기 “서경식은 교육자로서 어떻게 일본 사회의 중간층을 점하고 있는 ‘논포리’(탈정치화된) 젊은이들에게 가닿을 언어로 풀어낼 수 있을까를 절치부심했다”고 평가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시부야의 분석과 맞닿는다. “서경식이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말을 전하려고 한 이유는, 그가 일종의 ‘불안’을 느꼈기 때문일 것”인데,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기초적인 능력을 결여한 채 젊은이들이 사회로 나가는 것이 불안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기초적인 능력’이란 서경식이 젊은 세대들과 나누고자 했던 ‘교양’으로, 한마디로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다. 그리고 그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예술이다. “미술은 주관적인 것이 가장 허용되어야만 하는 세계”로, “자신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행위의 기본은 바로 자신의 미의식을 해방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주어로 삼는 이야기가 기세등등”한 이 시절, 서경식의 사유는 반딧불 같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