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거리
책은 파괴되기 쉬운 물건입니다. 인류 역사상 책을 파괴하는 가장 위협적인 요소는 불이었습니다. 모든 책과 사유를 수집하려는 꿈을 꾸었던 알렉산드리아 세라피움의 대도서관은 몇 차례나 불탔고, 숱한 두루마리 문서들이 기독교도들에, 또 아랍인들에 의해 땔감으로 사라졌습니다. 진시황은 ‘분서’(焚書)를 ‘사상 통제’의 대명사로 만들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이는 꾸준히 반복되어, 1992년 보스니아 내전 때 세르비아 민병대들은 사라예보의 도서관에 포탄을 쏟아부었습니다. 오죽하면 영국 옥스퍼드대 보들리 도서관장 리처드 오벤든이 도서관과 ‘지식 보존과 파괴의 역사’를 다룬 자신의 책 제목을 <책을 불태우다>(Burning the books)라 지었겠습니까.
다만 영국 역사학자 바이얼릿 몰러는 <지식의 지도>에서 책이 소멸하는 광경이란 이처럼 극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운명에 대해 현실적으로 가장 있었을 법한 시나리오를 생각해보면, 아마 도서관은 서서히 낡아가면서 훼손되었을 것이다. 파피루스가 해지면서 글씨가 점점 희미해졌을 것이고 누군가가 새로 필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불가피하게 그 문서는 소실되었을 것이다.”
그 옛날 파피루스 두루마리나 양피지 코덱스의 경우 누군가 베껴놓지 않은 것이 책의 소멸로 이어졌다면, 오늘날 종이를 대체하겠다는 전자책의 경우엔 어떨까요? 무한 복제가 가능하니 이론적으론 소멸할 염려가 없을까요? 전자책 5000여권이 ‘해킹’으로 유출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에 생각이 더욱 깊어집니다. 불, 습기, 부패, 좀벌레 등이 아니라면, 오늘날 책을 파괴하고 있는 가장 위협적인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요?
최원형 책지성팀장 circle@hani.co.kr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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