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소설, 잇다
백신애, 최진영 지음 l 작가정신(2022)
1939년의 순희는 남편과 사별한 후 외아들을 시가의 양자로 보내고 일본에서 미술전문 양화과를 졸업한 서른두 살 화가다. 외동딸이라 친정의 ‘대를 잇기’ 위해 반드시 재혼해야 할 처지인데, 무수한 구혼자들이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다 부모가 재혼 상대로 점찍어 놓은 의사를 우연히 만나는데 정작 순희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사람은 그 의사가 아들처럼 키운 친동생이자 열아홉 살 소년인 정규다. 아들보다 겨우 세 살 많은 소년을 사랑하게 된 순희는 그 사랑을 예술적 욕망으로 승화하고자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수록 경고의 환청처럼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순희의 사랑은 예술이 되지도 못하고 현실 속에서 결실을 보지도 못한다. 당시 자식 있는 30대 여성과 열아홉 소년의 사랑은 현실은커녕 소설의 설정이 되기에도 파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소설 속 순희는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소년 정규를 피해 도망치고 숨으며 죽음까지 떠올린다.
2022년의 순희는 폭력으로 침잠했던 결혼생활을 끝내고 홀로 청소년 딸을 키우는 사십 대 우체국 직원이다.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었지만 이혼 후 혼자 딸을 키우기 위해 안정적인 직업을 택했다. 자신의 꿈과 엄마로서 책임을 맞바꾼 순희는 퇴근 후 펍에 들러 맥주 한 잔을 비우거나 빗속에서 달리는 일을 좋아하며 삶을 견딘다. ‘취준생’ 이십 대 여성 정규는 편의점 ‘알바생’으로 순희를 처음 만나고 주말에 일하는 펍에 손님으로 온 순희를 두 번째 만나 서로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날 이후 정규는 ‘순희 씨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고 세 번째 만남에서 함께 천천히 걷다가 서로를 향한 끌림을 확인한다.
1908년생 백신애는 사회주의 여성단체에서 활동한 항일 여성운동가이자 신춘문예로 등단한 최초의 여성 작가였다. ‘내 마음은 항상 문학에 가 있었다’라는 말이 보여주듯 1939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식민지 조선의 가부장제 아래 구속된 여성들의 삶을 여성의 언어로 거침없이 그려냈다. 제13회 백신애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소설가 최진영은 백신애의 단편 ‘아름다운 노을’을 이어받아 당대에 불가능했던 순희와 정규의 사랑에 가능성의 싹을 틔워준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를 썼다.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한 권에 담아 함께 읽는 작가정신 출판사의 ‘소설, 잇다’ 시리즈 첫 번째 책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에는 백신애의 소설 3편과 최진영의 소설 1편, 에세이 1편, 그리고 백년 가까이 이어진 두 여성 작가의 연결을 독해한 해설이 실려 있다.
백신애의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저마다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 광기의 원인은 배신, 매혹, 열정, 상실 등으로 다양하나 그 근원에는 끝내 잘라낼 수 없는 사랑이 있다. 이들은 사랑해서 아프고 사랑할 수 없어서 아프며 사랑을 끝낼 수 없어서 아프다. 사랑과 고통이 한데 들끓는 광기의 지옥을 펼쳐놓고 세상을 떠난 백신애를 대신해 훗날의 최진영은 독자와 등장인물을 모두 위로하는 소설을 통해 말한다. 아플지라도 겁이 날지라도 미친 여자들의 사랑은 천천히 오래오래 가능할 것이라고.
이주혜 소설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