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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폐허’ 40곳이 들려주는 인간의 탐욕과 오만

등록 2023-06-09 05:01수정 2023-06-09 10:01

영국 대중문화역사가 엘버러
버려지고 잊혀진 장소들 찾아 소개

방치됐던 원전 터, 쇠락한 광산…
흥망성쇠의 역사 속 ‘그림자’ 직시
아이티의 상수시 궁전은 아이티의 혁명 영웅 앙리 크리스토프가 독재자로 변해 자신의 강력한 지위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건설했다. 고전적인 파사드와 바로크식 이중 계단 등을 갖춘 이 궁전을 짓기 위해 수많은 아이티인이 희생됐다. 한겨레출판 제공
아이티의 상수시 궁전은 아이티의 혁명 영웅 앙리 크리스토프가 독재자로 변해 자신의 강력한 지위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건설했다. 고전적인 파사드와 바로크식 이중 계단 등을 갖춘 이 궁전을 짓기 위해 수많은 아이티인이 희생됐다. 한겨레출판 제공

지도로 보는 인류의 흑역사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인 폐허 40
트래비스 엘버러 지음, 성소희 옮김 l 한겨레출판 l 2만3000원

영국의 유명 대중문화역사가인 트래비스 엘버러는 낯선 장소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기가 막히게 풀어내는 이야기꾼이다. 전작 <사라져가는 장소들의 지도>에서 그가 더는 여행할 수 없거나 곧 지도에서 사라질 곳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렸다면, 이번에 펴낸 <지도로 보는 인류의 흑역사>에서는 버려지고 잊혀지고 사람들이 찾지 않는 폐허 40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폐허’를 굳이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뭘까. 그는 “이러한 장소들이 품은 이야기는 덧없음과 소진, 흥망성쇠, 산업화와 환경, 인류의 오만, 신뢰할 수 없는 기억과 기념에 관해 중요한 교훈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생생한 컬러 사진과 친절한 지도를 보며 그가 안내하는 폐허를 따라가다 보면 책 제목 그대로 인류의 ‘흑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탐욕스럽고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고 차별과 편견에 가득한.

폴란드 정부는 1982년 북부 발트해 연안 근처 자르노비에츠라는 마을에 국가 최초의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에너지의 80%를 석탄으로 충당했는데 천연자원을 절약하고 화석연료를 수출하기 위해 이 같은 계획을 세운 것.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1986년엔 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인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가 발생했고, 이 여파로 원전 반대 시위가 거세졌다. 1990년 원전 개발은 결국 중단되고 만다. 30년 동안 녹슨 채 버려져 있던 원전 터가 최근 다시 차세대 원전 건설 기지 후보로 꼽히고 있다고 하니,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있는 사메자노성의 호화로운 디자인은 동양 건축에서 영향을 받았다. 19세기 피렌체 귀족이자 건축가인 페르디난도 판치아티키 시네메스 다나고나 후작은 상속받은 영지에 사메자노성을 지었는데, 이 성은 1970년대에 호텔로 개조됐다. 성과 부지를 유지하는 비용이 너무 많아 1990년대 초 결국 문을 닫았고, 성은 현재도 텅 비어있다. 한겨레출판 제공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있는 사메자노성의 호화로운 디자인은 동양 건축에서 영향을 받았다. 19세기 피렌체 귀족이자 건축가인 페르디난도 판치아티키 시네메스 다나고나 후작은 상속받은 영지에 사메자노성을 지었는데, 이 성은 1970년대에 호텔로 개조됐다. 성과 부지를 유지하는 비용이 너무 많아 1990년대 초 결국 문을 닫았고, 성은 현재도 텅 비어있다. 한겨레출판 제공

책은 또 자원이 고갈되고 산업의 흐름이 바뀌면서 쇠락한 장소도 다루는데, 스웨덴 그렌게스베리 지역이나 볼리비아의 우유니 기차 폐기장이 대표적인 예다. 비금속과 철광석이 풍부했던 그렌게스베리 지역엔 300년 동안이나 광산 산업이 발달했지만 자원이 바닥나자 광부들도 이 마을을 떠났다. 데스메탈과 블랙메탈 같은 음악 축제를 열며 지역을 되살려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소금 사막으로 유명한 우유니 지역 외곽에는 ‘기차의 무덤’이 있다. 이는 19세기 말 볼리비아를 탐욕스럽게 착취했던 영국의 흔적이다. 당시 영국은 런던 주식시장에서 끌어모은 자금으로 칠레에서 볼리비아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건설해 비료와 폭약을 제조하는 데 쓰이는 초석 또는 질산나트륨을 기차로 운송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의 화학자가 인공 질산염을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볼리비아에서 나오는 초석에 대한 수요가 줄었고 결과적으로 기차 또한 쓸모가 없어지게 됐다.

이처럼 한때는 영원히 번영하고 성공하고 성장할 것이라 생각했던 여러 지역의 흥망성쇠 이야기를 읽다 보면, 영원한 것은 없는데도 끝없이 탐욕만 추구하는 인간의 민낯을 직시하게 된다. 이외에도 아이티의 혁명 영웅 앙리 크리스토프가 독재자로 변해 무수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건설한 상수시 궁전 이야기나 정신병자들을 감옥처럼 가두고 학대했던 이탈리아의 볼테라 정신병원 이야기까지, 폐허에는 인류 역사의 ‘그림자’가 가득하다.

이색적인 주제, 길지 않은 분량으로 백과사전식 구성을 한 이 책은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다. 구글 지도에서 저자가 소개한 곳들을 찾아 사진을 보며 함께 읽는다면 재미를 두 배로 느낄 수 있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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