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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초인을 창조하고자 한 중세 연금술의 야망 [책&생각]

등록 2023-06-16 05:00수정 2023-06-16 10:31

미국 과학사학자 윌리엄 뉴먼
파라켈수스 등 연금술 역사 연구

“연금술은 인공 인간 창조 꿈꾼
근대과학의 자연정복 선구자”
인공 인간 ‘호문쿨루스’를 창조하고자 한 중세 말기 연금술사 파라켈수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인공 인간 ‘호문쿨루스’를 창조하고자 한 중세 말기 연금술사 파라켈수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프로메테우스의 야망
자연의 완전성을 탐구하는 연금술의 역사
윌리엄 뉴먼 지음, 박요한 옮김 l 길 I 4만3000원

연금술이라는 말은 과학의 빛이 들기 이전 옛 시대 인간의 기괴한 욕망이 빚어낸 헛된 꿈을 즉각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아는 대로 연금술은 황금을 만들려 한 신비주의자들의 망상이기만 했던 것일까? 연금술과 근대 과학혁명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미국의 과학사학자 윌리엄 뉴먼(68)의 2004년 저작 <프로메테우스의 야망>은 서양 연금술의 역사를 찬찬히 되밟아 연금술에 대한 통념을 깨뜨리는 책이다. 특히 이 책은 중세 말기 연금술사들의 저작을 살펴 연금술이 오늘날의 ‘생명복제’와 유사한 꿈을 꾸었음을 보여준다.

연금술은 헬레니즘 시기에 태어나 중세 아랍에서 흥성했다가 13세기에 유럽으로 역수입돼 17세기까지 위세를 떨쳤다. 이 책에서 뉴먼은 이 연금술의 역사를 ‘자연과 기예의 논쟁’이라는 틀로 해석해 연금술의 역사적 실상에 다가간다. ‘자연과 기예의 논쟁’이란 ‘자연이 우월하냐, 기예(기술‧예술)가 우월하냐’를 두고 르네상스 시대를 전후해 벌어진 논쟁을 말한다. 이 논쟁에 지침을 제공한 사람이 11세기 페르시아 철학자 아비켄나(이븐 시나)다. 아비켄나는 이런 말을 했다. “기예는 자연보다 허약하며 자연을 극복하기는커녕 섬길 수밖에 없다.” 인간의 기예는 자연의 탁월함을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는 선언이다. 이 선언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람들이 중세 연금술사들이었다. 연금술사들은 연금술이 물질을 변성시킴으로써, 다시 말해 수은 같은 비천한 금속을 황금 같은 고귀한 금속으로 바꾸어냄으로써 자연을 ‘완전성’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증명하려고 끊임없이 실험했다. 이 책은 연금술의 실험 정신이 17세기 보일과 18세기 라부아지에로 이어지는 근대 화학 혁명의 지적 기원이 됐다고 말한다. 연금술은 일견 터무니없어 보이는 탐구활동을 통해 근대의 문을 열어준 과학혁명의 선구자이자 조력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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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의 야망>을 쓴 미국 과학사학자 윌리엄 뉴먼. 위키미디어 코먼스

연금술의 역사를 탐사하는 길에 이 책이 특히 눈여겨보는 것이 중세 말기 연금술을 혁신한 스위스 의사 파라켈수스 폰 호헨하임(1493~1541)과 파라켈수스의 저작으로 알려진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natura rerum)다. 이 저작에서 파라켈수스는 인공의 방법으로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인공 인간을 부르는 이름이 호문쿨루스(homunculus)다. 파라켈수스의 ‘인공 인간’ 아이디어가 어디서 왔는지 알려면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발생론>에서 남성의 ‘정액’과 여성의 ‘생리혈’이 만나 태아가 형성된다고 기술했다. 독특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질료-형상 이론’에 입각해 여성과 남성의 가치를 아주 다르게 매겼다는 사실이다. 남성의 정액은 ‘순수 형상’에 가까운 것인 데 반해 여성의 생리혈은 ‘순수 질료’에 가깝다. 이 둘이 자궁에서 만날 때 정액이 주도권을 쥐면 남아가 생성되고 생리혈이 주도권을 쥐면 여아가 생성된다. 형상은 고귀하고 질료는 저급하다. 따라서 순수 형상에서 태어난 남아는 순수 질료에서 태어난 여아에 비해 선천적으로 우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남녀차별을 생물학적으로 정당화했다.

그런데 생물 발생에는 ‘유성발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의 보편적 믿음을 따라 ‘자연발생’도 있다고 보았다. 적절한 환경이 갖춰지면 꿀벌이나 진드기 같은 생명체가 저절로 생겨난다는 것이 자연발생설이다. 중세의 연금술사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두 가지 발생을 하나로 결합할 길은 없는지, 다시 말해 인간의 태아가 자연발생의 방식으로 생겨날 수는 없는지를 물었다, 바로 그 물음에 답한 것이 파라켈수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다. 여기서 파라켈수스는 생리혈을 인공의 플라스크에 밀봉한 뒤 자궁과 유사한 환경 속에 놓아두면 오직 질료로만 된 여성적인 괴물이 탄생한다고 주장하고 그 괴물을 ‘바실리스크’(basilisk)라고 불렀다.

더 주목할 것은 그 다음이다. 만약 남성의 정액을 플라스크에 밀봉해 자궁과 유사한 환경에 넣어두면,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아주 작은 남자아이가 생겨난다. 이 작은 남아를 부르는 이름이 호문쿨루스다. 정액은 순수 형상이므로 호문쿨루스는 물질성에서 해방된 순수 존재이고 그래서 몸이 투명에 가깝다. 이 작은 인간이 자라나 성숙한 상태가 되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저절로 알게 된다. 호문쿨루스는 ‘살아 있는 정신’이자 일종의 인공 초인이다. 이 호문쿨루스의 창조를 두고 <자연의 본성에 관하여>는 ‘모든 비밀 위의 비밀’이라고 부른다. 호문쿨루스 창조야말로 자연의 불완전성을 완전성으로 이끌어 올리는 연금술의 최종 승리를 보여준다. 이것이 뉴먼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통해 그려 보여주는 근대 초기 연금술의 야망, 다시 말해 인간을 창조하고자 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야망’이다.

뉴먼의 설명은 연금술에 관해 그동안 나온 상당수 견해들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옮긴이(박요한 서울대 인문의학교실 석사)는 ‘해제’를 통해 뉴먼이 논박하려는 것이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의 해석과 융 이론을 받아들인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해석이라고 설명한다. 융은 연금술의 ‘물질 변성’이 남성과 여성의 정신적 통합을 나타낸다고 보았고, 엘리아데는 연금술을 자연의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또 융과 엘리아데의 논의를 이어받은 페미니즘 과학사가들은 연금술사들이 자연을 거룩한 여성으로 숭배했다고 보고 연금술의 세계관이 반자연적인 가부장적 과학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뉴먼의 재해석을 통해 드러난 파라켈수스의 연금술은 철저한 남성우월주의에 입각해 자연을 복속시켜야 할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중세 말기의 연금술사들이야말로 근대 경험주의 주창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직계 선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베이컨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해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뉴먼은 중세의 연금술이 “헤르메스적으로(비의적으로) 출발하지만 베이컨적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뉴먼의 탐사를 통해 연금술의 이미지는 거의 반대로 뒤집힌다. 중세 연금술은 근대 과학을 낳은 모태였을 뿐만 아니라 근대과학이 일으킨 종교적·윤리적 논쟁의 섬뜩한 전조이기도 했던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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