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변화
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이근세 옮김 l 그린비 l 1만7000원
프랑수아 줄리앙(72)은 현대 유럽 철학에서 독특한 지위를 점하는 프랑스 철학자다. 그 독특함은 이 철학자의 예외적인 학문 이력에서 나온다. 줄리앙은 파리고등사범학교를 나와 그리스 철학 연구로 교수 자격을 얻은 뒤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학을 공부했다. 수십년의 중국 사상 연구는 줄리앙에게 유럽 바깥에서 유럽 사유를 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주었다. 그렇게 얻은 시야로 줄리앙은 중국 사상과 유럽 사상을 맞대면시키는 작업을 해왔는데 <고요한 변화>(2009)는 그런 작업의 한 양상을 보여주는 저작이다.
이 책의 제목으로 쓰인 ‘고요한 변화’는 명말청초 유학자 왕부지가 쓴 역사서 <독통감론>에 나오는 “은밀한 이동과 고요한 변화”라는 말에서 따왔다. 줄리앙은 이 말이 유럽 사유와 중국 사유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점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중국 사유가 ‘고요한 변화’로 세상사를 이해하는 데 반해, 유럽 사유는 그런 변화를 보지 못하는 맹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 줄리앙의 통찰이다. 이 책은 유럽 사유의 맹점을 선명히 드러내는 사례로 <장자> ‘지락’ 편의 구절을 제시한다. 부인의 죽음에 북 치며 노래를 부르는 장자를 친구가 나무라자 장자가 말한다. “헤아릴 수 없음에 뒤섞인 가운데 변하면 기가 있고 기가 변하면 현실화하며 현실화함이 변하면 삶이 있다.” 이 구절을 프랑스어 번역가는 이렇게 옮겼다. “빠져나가고 포착 불가능한 어떤 것이 기로 변하고 기는 형태로, 형태는 삶으로 변한다.”
프랑스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 위기미디어 코먼스
프랑스어 번역문은 원문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문장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프랑스어 번역문에 나오는 ‘어떤 것’(quelque chose)이라는 말이다. 중국어 원문에는 없는 ‘어떤 것’이라는 명사가 주어로 등장해 문장 전체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것’이 주어로 상정되면 ‘그 어떤 것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게 된다. 또 이런 물음은 ‘어떤 것’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 ‘창조주가 그 기원 아닌가’ 하는 물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중국어 원문에서는 나올 이유가 없는 물음이 유럽어로 옮겨지자마자 튀어나오는 것이다.
여기가 중국 사유와 유럽 사유가 확연히 갈리는 지점이다. ‘주어’를 전제하는 유럽어에서는 만물의 변화를 ‘주어 곧 주체’(sujet, subject)의 행동으로 설명하는 것을 자명하게 여긴다. ‘주어 곧 주체’는 그리스 사유의 ‘기체’(히포케이메논, hypokeimenon)에서 온 말이다. 기체란 어떤 사태의 ‘바탕에 깔려 있는 실체’를 뜻한다. 그 기체가 바로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다. 그러나 중국 사유는 양상이 다르다. 기체 혹은 주체가 능동적인 행위로 상황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흐름을 따라 스스로 바뀌어간다. <역경> ‘계사전’에 나오는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 간다”라는 말이 그런 주체 없는 변화를 보여준다.
반면에 유럽어의 사유는 주체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유럽 사유의 그런 특징을 일찍이 보여준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체 곧 주체가 운동함으로써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더 주목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변화를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으로 여겼고, 그 끝을 목적(텔로스)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건축 행위’라는 운동이 ‘건축된 집’이라는 목적에 이르러 끝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로는 변화의 ‘이행 과정’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늙음이라는 변화를 보자. 늙음은 주체의 행위의 결과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배움‧치료‧성장과 함께 노화를 열거한 뒤 그것들이 건축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노화가 건축처럼 주체의 능동적 행위의 완수인가? 여기서 그리스 철학은 비틀거린다. 노화는 목적이 아니라 끝없는 변화의 과정이자 결과일 뿐이다. 노화야말로 ‘고요한 변화’로 설명해야 할 사태다.
중국 사유는 음과 양의 상관성이라는 틀로 이 이행 과정을 살피고 그 결과를 가늠한다.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어서 그 상관관계 속에서 변화는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젊음 속에 이미 늙음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어받은 유럽 사유는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고 그 끝은 목적이자 완성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중국 사유는 끝을 목적이나 완성으로 보지 않는다. 유럽 사유가 ‘시작과 끝’의 사유라면, 중국 사유는 ‘끝과 시작’의 사유다. 끝은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주역> 64괘 중 마지막 두 괘가 ‘기제’와 ‘미제’인 것이 그 사태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기제는 ‘이미 건넜다’, 곧 ‘끝났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다음에 미제 곧 ‘아직 건너지 않았다’가 나온다. 끝이 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끝없는, 주체 없는, 고요한 변화를 읽어내는 것이 중국 사유의 특징이다.
줄리앙은 중국 사유와 유럽 사유를 맞대면시킴으로써 거기서 ‘간극’(벌어진 틈)을 찾아낸다. 이 간극은 두 문화 사이의 단순한 차이가 아니다. 차이의 사유는 다름을 확인함으로써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사유다. ‘너의 다름’을 통해 ‘나의 나임’ 곧 나의 자기동일성을 확인하는 것이 차이의 사유다. 반면에 간극의 사유는 다른 문화를 통해 내 문화의 허점과 빈틈을 발견하는 사유다. 바로 그런 발견을 통해서 우리가 자명하게 생각했던 것이 자명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고 자기동일성의 완고한 틀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간극의 사유로써 줄리앙은 문화보편주의에 반대함과 동시에 문화상대주의에도 반대한다. 문화보편주의가 다른 문화의 다름을 흡수하는 패권적 사유라면, 문화상대주의는 각각의 문화가 고유한 본질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자폐적 사유다. 그러나 어떤 문화도 본질이 고정돼 있지 않다. 보편주의의 패권도 상대주의의 고립도 바른 길이 아니다. 여기서 줄리앙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공통’(common)의 사유다. 다른 문화와 만나 내 문화의 변화를 일으키는 기반이 ‘공통’이다. 닫힌 보편성을 넘어 간극을 통해 열리는 더 높은 보편성이 공통성인 셈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