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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바리데기 신화는 ‘대극의 합일’ 이루는 자아의 드라마 [책&생각]

등록 2023-07-14 05:00수정 2023-07-14 08:22

프로이트와 융의 분석 방법 원용
정신분석가 이창재의 신화 해석

동아시아 포함 전 세계 신화 대상
무의식 저층 탐사하는 고고학 작업
정신분석학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왼쪽)와 프로이트에게서 독립해 분석심리학을 세운 카를 융. 위키미디어 코먼스
정신분석학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왼쪽)와 프로이트에게서 독립해 분석심리학을 세운 카를 융. 위키미디어 코먼스

신화와 정신분석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에 숨겨진 인간 정신의 기원
이창재 지음 l 아를 l 3만3000원

이창재 프로이트정신분석교육원 원장은 연세대에서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정신분석학으로 관심을 돌려 30년 가까이 이 분야를 연구해온 학자다. 〈신화와 정신분석〉은 정신분석학의 개념과 방법을 도구로 삼아 한국‧중국‧일본 신화를 포함해 전 세계의 주요한 신화를 해석한 책이다. 2015년에 출간된 저작의 내용을 전면 수정‧보완해 다시 펴냈다.

신화 해석에 관한 고전적 작품으로는 제임스 프레이저의 대작 〈황금가지〉(1890~1915)가 꼽힌다. 프레이저의 작업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카를 융의 신화 해석에 큰 자극을 주었다. 프레이저의 뒤를 잇는 20세기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전 세계 신화를 탐사해 신화에 담긴 의미를 독자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이 작업을 할 때 캠벨이 도움을 받은 것이 융과 프로이트의 분석 방법이었다. 〈신화와 정신분석〉은 캠벨과 유사한 방식으로 프로이트와 융의 개념을 기본으로 삼아 신화를 해석하되, 멜라니 클라인이나 자크 라캉 같은 현대 정신분석학의 해석 방법도 참조한다.

프로이트와 융은 정신분석학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묶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의 무의식 이해는 크게 다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학문을 ‘정신분석학’이라고 불렀고, 프로이트의 후계자였다가 뒤에 독립한 융은 자신의 연구를 ‘분석심리학’이라고 칭했다. 두 사람의 길이 갈리는 결정적 지점은 무의식의 원초적 힘, 곧 ‘리비도’를 어떻게 보느냐에서 발견된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범성욕설로 불리는데, 그 핵심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3살 이전까지 엄마와 밀착해 있던 유아가 아버지의 침입으로 엄마와 떨어지게 되면 그 아버지를 없애고 엄마와 다시 결합하려는 욕구를 느끼는데, 이 욕구가 좌절될 때 생기는 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은 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중심으로 하여 구성된다. 여기에 더해 후기의 프로이트는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생물학의 이론을 받아들여, 인류의 선조들이 겪은 중대한 경험의 흔적이 본능에 흡수돼 후손에게 유전된다고 생각했다. 선천적인 본능과 충동이 무의식의 저층을 이루고 여기에 후천적으로 형성된 무의식이 쌓이는 셈이다. 그러나 선천적인 무의식이든 후천적인 무의식이든 성적 욕망이 핵심에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 성적 욕망이 무의식의 드라마를 만들어간다는 것이 프로이트 이론의 특징이다.

반면에 융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 곧 리비도를 성욕에 한정하지 않고 보편적인 생명 에너지로 보았다. 프로이트의 범성욕설을 부정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융이 생각한 무의식이 개인의 경험을 넘어선 집단적 무의식이라는 점이다. 모든 개인은 집단무의식을 타고난다. 이 집단무의식은 ‘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 자기’라는 원형들로 구성되는데, 이 모든 원형들은 마치 유전자를 통해서 본능을 물려받듯 선천적으로 주어진다. 융은 개인의 자아가 심층적 집단무의식과 대면해 그 무의식을 차례로 의식에 통합함으로써 자아의 완성, 인격의 완성에 이른다고 보았다. 그 과정을 융은 ‘개성화 과정’ 혹은 ‘자기실현’이라고 불렀다. 융과 달리 프로이트는 ‘억압된 오이디푸스적 소망’을 충족시키려는 충동과 그 충동을 제압하려는 초자아의 명령 사이에서 자아가 형성된다고 본다. 이때 자아에 충분한 힘이 있다면, 대립하는 두 힘을 다스려 균형을 잡을 수 있고 성숙한 자아로 커 나갈 수 있다.

프로이트와 융의 이런 차이는 신화를 해석하는 데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신들의 근친상간’이라는 모티브를 프로이트는 인류가 문명세계에 진입하는 순간에 형성된 오이디푸스적 소망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프로이트와 달리 융은 신들의 근친상간을 집단무의식 안의 양성성, 곧 ‘아니마(남성 내부의 여성성)와 아니무스(여성 내부의 남성성)’의 통합을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영웅 신화를 두고도 두 사람의 생각은 갈린다. 프로이트의 영웅이 오이디푸스적 갈등을 겪는 분열된 인격인 데 반해, 융의 영웅은 집단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온갖 모험을 겪으며 성숙한 인격으로 거듭나는 개인의 자아다. 신화를 보는 프로이트와 융의 눈은 이렇게 다르지만, 지은이는 두 사람의 관점을 조합하면 고고학자가 유적을 탐사하듯 신화의 무의식적 지층을 깊이 파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인류 최초의 신화라 할 수메르의 길가메시 신화에서 시작해 세계 전역의 신화를 분석하는데, 특히 영웅신화 해석이 중심을 이룬다. 영웅신화는 지역을 막론하고 거의 동일한 구조를 지녔는데,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1)미래의 영웅이 될 아기가 거친 환경에서 태어난다. 2)친부모에게서 버림받은 뒤 양부모에게 양육된다. 3)청소년기에 자신이 자란 땅을 떠나 모험을 시작한다. 4)뜻밖의 역경을 겪고 쓰러진다. 5)조력자의 도움으로 살아나 비범한 능력을 습득한다. 6) 고향으로 돌아가 난제를 해결한다. 7)영웅으로 칭송받는다.’ 이 영웅 신화의 하나가 한국의 무속인 사이에 구전돼 온 ‘바리데기 신화’다.

바리는 불라국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의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나 버림받는다. 딸을 천대하는 집단문화의 희생양이다. 바리는 노부부에게 발견돼 자라고, 오구대왕 부부는 큰 병에 걸린다. ‘막내딸을 버린 탓’이라는 말을 들은 왕이 바리를 찾아낸다. 바리는 부모를 살리려는 마음에 영생수를 찾아 서천서역국으로 모험을 떠난다. 모험은 일종의 ‘통과의례’다. 바리가 통과의례 과정에서 만난 사람 중에 ‘빨래하는 할멈’이 있는데, 할멈은 “검은 옷을 희게 하고 흰 옷을 검게 하면 가는 길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지은이는 이 이야기를 무의식의 ‘그림자’를 정화시켜 자아에 통합하라는 메시지로 해석한다. 바리의 모험은 자아의 모험이다. 바리는 서천서역국에서 거인 ‘무장승’을 만난다. 무장승은 바리의 무의식 속 남성성 곧 아니무스를 상징한다. 바리의 정신이 온전히 발달하려면 남성성을 받아들여 여성성과 결합해야 한다. 마지막에 바리는 영생수를 구해 고향으로 돌아와 죽은 부모를 살려낸다. 이야기의 표면은 효라는 유교 관념에 감싸여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것은 ‘대극의 합일’을 이루어 자기를 실현하는 자아의 드라마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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