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생전의 모습. ⓒ이상엽.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사회평론아카데미 제공
노회찬 평전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기획, 이광호 지음 l 사회평론아카데미 l 2만3000원
제17대 국회 개원 첫날이던 2004년 5월31일, 민주노동당 소속 초선 의원(10명)들이 국회에 등원했다. 소감을 묻는 질문에 노회찬(1956~2018)이 대답했다. “당사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는 데는 5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우리 서민들 노동자 농민 대표가 여기까지 오는 데 사실 50년이 걸렸어요.” ‘진보정당’이 국회에 입성한 것은 1960년 4월혁명 직후 치러진 총선 이후 44년 만에 처음이었다. 노회찬은 이날을 자기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날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노회찬 평전>을 쓴 이광호(66)는 노회찬의 아주 오래된 꿈을 이렇게 새겼다. “노동운동에서 비합법 전위정당, 합법적 대중정당으로 노선과 방법은 시대와 사회적 조건에 따라 변해왔지만, 그가 정치를 통해 바꾸려고 했던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그의 꿈과 목표는 ‘인간 해방, 노동 해방’이라는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노회찬 5주기(7월23일)를 맞아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이 기획해 펴낸 책이다. “노회찬의 삶과 꿈을 입체적으로 복원하여, (…) 안타깝게도 중도에 부러져 미완으로 끝난 그의 삶을 가능태 혹은 지향점의 형태로 우리 곁에 다시 불러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산가족 자녀로 부산에서 나고 자란 노회찬은 중학생 때부터 비판적인 사회의식을 드러냈고, 대학 졸업과 함께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인천 지역 지하 조직인 ‘인민노련’ 조직책으로 활동했다. 6월항쟁으로 한국 사회가 출렁일 때, 노회찬은 “노동자 중심의 진보적 대중정당을 만들어 6월 시민항쟁을 주도한 정치 세력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연대와 견제 속에 함께 전진하는 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경로”라고 주장했다. ‘운동권’ 다수로부터 외면받았지만, 이후 노회찬은 “진보정당이 없는 정치를 생각한 적은 없었”으며, 스스로 ‘창당 원천 기술자’라 부를 정도로 독자적 진보정당 건설 시도를 그치지 않았다.
노회찬의 어린 시절 모습이 담긴 가족 사진.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사회평론아카데미 제공
제17대 국회 개원 첫날인 2004년 5월31일, 국회에 등원하는 민주노동당 의원들. 왼쪽부터 최순영, 노회찬, 단병호, 권영길, 천영세, 심상정 의원.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사회평론아카데미 제공
노회찬의 궁극적인 꿈은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로 바꾸는 것이었고, 이는 국민들의 마음을 얻는 정치, 진보정당의 집권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일상의 변화가 장기적으로 축적되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혁명가에서 현실 정치인이 된 노회찬의 생각이었다.” 먼저 진보정당이 오롯이 서야 했다. 2000년 민주노동당이 출범했을 때 그가 “인생 목표의 절반을 이뤘다”고 한 까닭이다. 그에겐 ‘계획’이 있었다. 진보진영 내 다양한 정파의 연합, 노조 등 대중조직의 공식적 지지, 선거법 등 진보진영에 불리한 제도적 장애물 제거 등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세 가지 전제조건을 일찌감치 꿰뚫어 보았고, “의지를 앞세우지 않는 직업전투원”의 태도로 하나하나를 풀어나갔다.
1997년 권영길을 대선 후보로 출마시킨 ‘국민승리21’은 대중조직의 공식 지지를 바탕으로 탄생한 첫 진보정당이었다. 2001년엔 헌법재판소로부터 ‘1인1표’로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원을 선출하던 기존 선거법에 대한 위헌 판정을 이끌어냈다.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들을 해결한 것이다. 민주노동당 돌풍은 진보정당의 존재와 의미를 국민들에게 각인시켰다. 탄핵 정국 때 티브이 토론회에 나온 노회찬은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커메진다” 등 서민의 일상 언어로 기성 정치판을 비판하며 주목받았고, ‘삼성 엑스파일’ 폭로에서 사회적 약자 보호까지 사회적·시대적 의제를 선도하는 의정활동 등으로 ‘대중정치인’으로서 인기를 이어갔다.
집권이라는 나머지 절반의 목표로 나아가야 했지만, 민주노동당은 ‘종북-패권주의’ 논쟁으로 갈라지고 만다. 진보정당의 필수조건이었던 정파 간 연합과 노동자 대중조직 지지가 동시에 무너지는 일이었다. 노회찬은 분당을 반대했으나 어쩔 수 없이 탈당으로 몰렸고, 이후 진보정당의 이합집산 속에서 진보신당에서 정의당까지 여러 차례 당적을 옮겨야 했다. 그러나 무능과 분열 속에서도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새로 벼리기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2016년 토론회 발제에서 드러나듯, ‘진보’와 ‘개혁’ 세력의 정치적 연대로 ‘장기 집권’에 성공해, 새누리당(수구) 세력이 향후 30년 동안 집권하지 못하도록 배제하고 새로운 공화국(제7공화국)을 만드는 것이 그의 큰 그림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진보정당이 “운동권이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당이 아니라 서민들의 부름에 달려가는 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유명한 ‘6411번 버스’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첫차를 타며 고된 노동을 하는)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의 손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에겐 ‘투명인간’ 민초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투명정당’에 대한 자성과 자책이 언제나 먼저였다.
지은이는 노회찬 정신을 휴머니즘, 사회주의, 사민주의 세 가지로 제시하고 각각 민중성, 급진성, 현실성·현장성으로도 설명했다. “자본주의의 구체적 현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휴머니즘은 언제나 민중이 고통받는 현장을 출발로 삼았다는 점에서 민중성이란 말과 다르지 않다. 첫차를 타는 청소노동자, 현대차 비정규직, 쌍용차 해고 노동자, 용산 참사 피해자 등 구체적인 인간이 ‘노회찬 정치’의 존재 이유였다. 이를 ‘심장’으로 삼고, 자본주의를 뿌리부터 개혁한다는 목표로서의 사회주의(급진성), 현실 속에서 대중과 함께 실현해나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사민주의(현실성·현장성)가 각각 ‘머리’와 ‘발’이 되었다.
2010년 1월9일 서울 용산구 남일당 앞에서 용산 참사 희생자들을 기리는 노제에 참석한 노회찬. ⓒ이상엽.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사회평론아카데미 제공
2009년 4월30일 울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조승수 의원(진보신당)의 당선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빗자루를 들고 기타연주를 흉내내는 노회찬(맨 오른쪽)의 모습. ⓒ이상엽.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사회평론아카데미 제공
노회찬 스스로 가장 좋아했던 프로필 사진.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사회평론아카데미 제공
2018년 댓글 조작 수사에서 ‘드루킹’ 김동원이 노회찬에게 돈을 주었다는 정황이 불거졌고, 노회찬은 7월23일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김동원이 운영하던 ‘경제적 공진화 모임’)로부터 모두 4천만원을 받았다. (…)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자신의 잘못이 빚어낸 ‘개인적’ 부끄러움의 ‘공적’ 무게를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라 풀이했다. 한마디로, 평생을 바친 당의 지속을 위해 개인적 삶의 중단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혁명가’ 노회찬은 미식가, 요리사, 첼로 연주자, 음악·예술 애호가 등 ‘낭만파’이기도 했다. “그에게 세상은 점진적으로, 혹은 조건이 맞으면 혁명적으로 바꿔야 할 대상인 동시에 도처에 숨어 있는 삶의 즐거움과 기쁨을 찾아내 누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 인간 노회찬은 삶을 뜨겁게 사랑하고 즐긴 ‘슬기로운 이중생활’의 주인공이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