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24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세월호 침몰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고 실종자 수색 및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열린 범국민 촛불행동에 등장한 촛불과 종이 팻말. 참사에 대한 애도와 분노의 마음을 투표 행위로 이어가겠노라는 다짐을 담았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최태현 지음 l 창비 l 2만3000원
환멸과 냉소의 날들이다. 오랜 세월 피땀 흘려 일구어왔던 민주주의의 토대가 이토록 얕고 허약했단 말인가. 눈떠보니 후진국을 넘어, 눈떠보니 독재 국가로 퇴행하는 거침없는 질주 앞에서는 분노나 슬픔조차 사치스럽다는 느낌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과연 회생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민주주의를 원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의 지은이(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간곡하게 말한다. 민주주의는 효과적이지 않고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재가 답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민주주의에 내재한 역설과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로부터 희망의 근거를 건져 올려야 한다고 최 교수는 강조한다. 여느 민주주의 관련 논의에서 배제되곤 하는 마음과 감정, 상상력의 가치를 역설하는 것이 이 책의 특장점이다.
논지의 출발은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의사 표출과 정치인들의 결정, 공무원들의 실행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과정 하나하나에는 뜻밖의 역설이 숨어 있고 그것이 민주주의를 함정에 빠뜨리고 후퇴시키기도 한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가 아닌 대의민주주의의 형태를 띠게 마련인데, 선거로 뽑힌 대표자가 그를 뽑은 유권자 개개인의 이익 또는 바람을 모두 충족하기란 불가능하다. 뭉뚱그려서 ‘전체’의 이익을 추구한다고는 하지만, 그 결과 누락되는 이들의 존재에는 소홀하기 십상이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대목은 오히려 “무엇이 대표되지 않는가”의 문제다.
정부는 사안에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국민의 세금을 기반으로 존속하지만, 거기에도 역설이 적지 않다. 정부는 다양한 문제들 가운데 풀고 싶은 것만을 취사선택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민주적 원칙에서 자신을 예외로 두려고 한다. 정부의 한계를 민간의 역할로 보완하고자 거버넌스 개념이 등장했지만, “바로 이러한 거버넌스 과정에서 공적인 문제 해결에 책임 있는 국가가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거버넌스의 역설이다.
정부의 손과 발에 해당하는 공무원의 행위에도 역설은 깃든다. 공무원은 국회나 정부가 결정한 업무를 효율적으로 집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주도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치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공무원의 복지부동을 비판하는가 하면, 권한을 넘나드는 적극 행동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는 한다.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표현은 정치 바람에 휘둘리지 않고 맡은 업무만을 수행하고자 하는 공무원의 소극적 자유와 관계된다. 그러나 헌법에 명시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조항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공무원의 업무 수행과 정치는 말처럼 쉽사리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보통의 시민들이 정치의 존재감을 가장 확실하게 느끼는 것은 지도자 덕분(?)일 가능성이 크다. 이상적이기로야 지도자는 시민들의 염원을 받아안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사심 없이 헌신하는 인물일 테지만, 현실에서 지도자는 우리를 절망시키고 분노하게 만들기 일쑤다. 직면한 문제가 크면 클수록 강력한 영웅적 지도자를 갈구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올바른 문제 해결 방향이 아니다. “오늘날의 복잡한 문제는 거대한 한 명의 철인왕, 즉 국가가 아니라 작은 수많은 시민들이 풀어가야 하는 것들”이다. 시민은 정치의 객체 또는 구경꾼이 아니라 그 자신이 적극적이고 책임 있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지혜를 사랑하는 철인(哲人)이 정치 지도자라는 권력 또는 굴레를 취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권력 자체를 좇고 부패에 취약한 이가 지도자가 된다는 지도자의 역설이 치명적이다.
2021년 10월16일 저녁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여수 실습생 고 홍정운군 추모 촛불 집회가 열려 홍군의 친구들과 특성화고 학생 및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홍군을 추모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일까. 전체 8장으로 이루어진 책의 6~8장은 지은이가 생각하는 대안 또는 해법에 할애된다. 해법이라고는 해도 손오공의 여의봉처럼 화끈하고 직접적인 효과와는 거리가 멀다. 보기에 따라서는 답답하고 한가한 이상론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법하다. 지은이는 우선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오해부터 바로잡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는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시민의 자유를 위한 제도로 고안되었는데, 오늘날 국가 역할의 확대로 인해 민주주의 체제에 문제 해결을 기대하게 되었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곤혹스러운 역설이다.
해법으로서의 민주주의에 관해 논하면서 지은이가 강조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마음’과 ‘작은 공(共)’이다. “민주주의는 헌법과 법률, 대통령 집무실, 여의도 국회의사당, 다수결 원칙 같은 것으로 드러나 있지만, 그 근원은 우리의 마음”이라는 대목에 이 책의 핵심이 담겨 있다. 민주주의는 제도와 원칙 이전에 마음의 문제라는 것. 그런 맥락에서 지은이는 상상력을 통한 타자 이해, 두려움과 혐오가 아닌 사랑과 공감, “고통을 공유하는 가운데서 나오는 슬픔” 같은 감정과 마음의 결들을 민주주의의 바탕으로 제시한다.
2022년 11월12일 저녁 서울 중구 숭례문 앞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책임자 처벌 촉구 시민촛불집회에서 참가들이 촛불 화면을 켠 휴대전화를 들고 있다. 장대비가 내린 이날 집회에서는 촛불 대신 휴대전화 촛불이나 엘이디(LED) 초를 들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그런 민주주의의 마음이 발현되는 공간으로서 ‘작은 공’ 역시 이 책에서 지은이가 내세우는 득의의 개념이다. ‘작은 공’은 “국가 단위가 아닌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의 사람들이 ‘함께하지만 그 이름으로 인해 억압되지 않는’ 삶의 단위”를 가리킨다. 마을 단위의 자조집단, 도시의 임의집단, 직장의 소그룹, 조합, 환우회 등이 두루 작은 공에 해당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구체적·일상적 삶에 착근되어 구성된 관계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작은’이란 단순히 사회적 약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거시적 사회구조보다는 미시적이고 실존적인 삶에 주목하고자 하는 의도를 표현한 것이고, 권력 행사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절망에 대한 성찰이 희망의 시작이 되어야” 하며 “절망과 희망은 사실 함께 있다”는 지은이의 결론에 실망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비판이나 멋진 대안이 아니라 성찰을 도모하는 데에 이 책의 목적이 있다는 지은이의 설명이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