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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아빠가 빵 대신 사온 세계지도…고난을 압도하는 희망 [책&생각]

등록 2023-09-15 05:00수정 2023-09-15 11:04

내가 만난 꿈의 지도
유리 슐레비츠 지음, 김영선 옮김 l 시공주니어(2008)

유리 슐레비츠의 ‘그림으로 글쓰기’(1985, 다산기획 2017)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림책 작가, 편집자들이 교과서처럼 읽는 책이다. 그는 “감상적인 생각은 좋은 어린이책을 만드는 데 필수 조건인 기예를 대신할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림책 작가는 그림뿐 아니라 책의 구조까지 꿰뚫고 있어야 한다며 선 긋기, 장면 연결하기, 제본 방식, 심지어 적절한 포트폴리오 케이스까지, 모든 과정을 세세히 설명한다. 자신도 그림책 작가인데 남한테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려주어도 되나 싶을 정도다. 덕분에 우리는 ‘새벽’과 같은 걸작이 탄생한 과정을 엿볼 수 있다. 16쪽 안에 자연과 삶의 신비를 담아내기 위해 계산 또 계산했을 것이다.

작가는 1935년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겨우 네 살이었다. 그는 아파트 복도에 포탄이 떨어지는 걸 보면서 가족과 함께 바르샤바를 떠났고, 중앙아시아와 유럽 등지를 떠돌다 20대에 미국 뉴욕에 정착했다. ‘내가 만난 꿈의 지도’는 네다섯 살 때 투르키스탄에서 보낸 날들을 담은 그림책이다.

전쟁을 피해 무작정 동쪽으로 도망쳐 온 ‘나’와 가족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땡볕이 내리쬐고 먼지 바람이 부는 낯선 고장에서 모르는 부부와 손바닥만 한 방에서 함께 지내며 잠도 흙바닥에서 잔다. 특히 이들에게는 먹을 것이 부족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빠는 빵을 사러 시장에 갔다가 난데없이 지도를 한 장 사 왔다. “내가 지도를 사 왔어!” 아빠는 자랑스럽게 외친다. 어차피 손톱만 한 빵밖에 살 수 없으니 배고프기는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말해보지만 ‘나’는 실망하고 화가 나서 아빠를 절대 용서하지 않기로 한다.

다음 날부터 ‘나’에게 놀라운 일이 생긴다. 아빠가 벽에 걸어준 세계지도에 푹 빠진 것이다. ‘나’는 몇 시간이고 지도를 들여다본다. 어쩌다 종이가 생기면 며칠이고 지도를 베껴 그린다. 모르는 도시의 이름으로 말장난을 하고, 마침내 그것을 주문 삼아 멀리 떠나게 된다. ‘나’는 남루한 방에 있지만, 지도 여행에서는 시원한 바닷가를 내달리고 눈 덮인 산을 오르며 아름다운 새가 가득한 사원을 보고 야자수 그늘에서 쉰다. “배고픈 것도, 힘든 것도 모두 잊은 채 말이에요.” ‘나’는 아빠를 용서한다. ‘나’에게는 고난을 압도하는 희망이 생겼으니까.

엄격할 정도로 세부사항과 기예를 중시하는 작가가 어린 시절 이런 몽상가였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끈다. 처음에는 대강 윤곽만 보였던 지도가 ‘나’가 빠져들수록 선명해지는 장면들, 온 세상을 다 가진 ‘나’의 황홀함을 표현한 마지막 장면에서 ‘잘 읽히는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는 작가의 신념을 다시 본다. 한편으로 나는 빵 대신 지도를 사는 아빠의 마음도 헤아려본다. 시장 한복판에서 낙담한 듯 뒷모습을 보이고 선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 잘못 없이 빈손으로 떠돌이 생활을 시작하는 아빠에게도 그 지도가, 아이와 함께 볼 지도가 필요했을 것 같다. 시름이 깊어만 가는 요즘 우리에게도 그런 지도가 절박하다.

김소영 독서교육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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