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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가부장제가 만들지 않은 사물이 하나라도 있을까 [책&생각]

등록 2023-09-15 05:00수정 2023-09-15 13:39

독일 여성 작가의 분노 어린 탐구
언어·화장실·의료체계·자동차…

평균 서구 남성이 모든 사물의 척도
“가부장의 역사가 디자인의 역사”
여성 공공 화장실 부족 문제는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네덜란드에서는 2015년에 이를 문제삼는 소송이 제기됐지만, 판사는 오히려 남성 화장실이 더 필요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게티이미지뱅크
여성 공공 화장실 부족 문제는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네덜란드에서는 2015년에 이를 문제삼는 소송이 제기됐지만, 판사는 오히려 남성 화장실이 더 필요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게티이미지뱅크

사물의 가부장제
세계는 왜 여성에게 맞지 않을까
레베카 엔들러 지음, 이기숙 옮김 l 그러나 l 2만원

21살의 네덜란드 여대생 피닝은 친구들과 시내에서 놀다가 새벽에 귀가하려는데 소변이 마려웠다. 방광이 꽉 찬 상태로 자전거를 타고 집까지 3㎞를 달리기란 무리였다. 당시 암스테르담 시내에서 새벽에도 이용할 수 있는 공중화장실은 남성용 소변기 35개와 2군데의 양변기 화장실이 전부였다. 근처에 남성용 소변기는 있었지만, 양변기 화장실은 1.5㎞ 이상 떨어져 있었다. 피닝은 남성용 소변기 근처 구석진 곳에서 노상 방뇨를 했고, 운이 나쁘게도 경찰관들에게 걸려 범칙금 딱지를 발부받았다. 그는 범칙금을 내는 대신 소송을 냈다.

판사는 놀라운 판결을 내렸다. 그렇게 급했다면 남성용 소변기를 이용했으면 되었다고. 나아가 판사는 그때까지 노상 방뇨를 하다가 붙잡힌 여성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공공장소에 더 많은 여자 화장실을 설치할 필요성은 없으며, 오히려 많은 남자들이 노상 방뇨로 붙잡혀 오는 걸 보건대 남성용 소변기가 더 필요할 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2015년에 벌어진 일이다. 네덜란드에서는 1960년대 말 이미 ‘여성을 위한 더 많은 공중화장실을 설치하라’는 운동이 벌어졌는데, 이 판결은 45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현실을 보여준다. 첫째는 신체구조상 남성 소변기를 이용하기가 불가능한 여성에게 ‘남성 소변기를 이용하면 되지 않느냐’는 뻔뻔한 몰지각이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과 같은 기득권층의 몰지각은 단순한 둔감함을 넘어서는 가해다. 둘째는 남성의 노상 방뇨는 더 많은 남성 소변기의 필요라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만, 여성의 노상 방뇨는 더 많은 여성 화장실의 필요라는 결론으로 결코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일 여성 작가가 쓴 ‘사물의 가부장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환경이 가부장제에 의해서 어떻게 설계되고 창조되는지 까발린다. 가부장제가 초래한 불편은 여성 화장실의 긴 줄만이 아니다. 누가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을지, 누가 질병을 이겨낼지, 무엇이 질병이고 무엇이 질병이 아닐지, 언어는 왜 지금의 모습인지, 모든 대로의 이름은 왜 남자 이름인지도 결정한다. 꽃무늬 원피스부터 축구화, 비디오 게임, 전동 드릴, 가구, 의약품까지 가부장제가 설계하지 않은 품목은 없다.

유럽과 미국에서 남자가 교통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여자의 2.6배다. 남자가 더 자주 운전하고 더 위험한 운전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강도의 교통사고를 당한 남녀를 비교했을 때, 여성이 중상을 입을 확률은 남성보다 47% 더 높다. 왜냐하면 자동차 산업은 수십년간 177㎝, 체중 75.5㎏의 젊은 남성의 체형을 가진 마네킹으로만 안전실험을 해 왔기 때문이다.

에어컨이 발명된 뒤 미국 공공건물에서의 적정 냉난방 규준 역시 몸무게 70㎏인 40대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그 덕에 여성들은 한기에 몸을 떨면서 일을 해야 한다. 남성이 사무실의 온도만 결정하는 건 아니다. 사무 기기와 가구 역시 남성 체형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사무실용 회전의자들에 모리츠, 보리스, 팀 등 남자 이름이 붙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부장의 역사는 곧 디자인의 역사였다. 그 디자인은 오직 남성에게 맞춤으로 제작되었다. 이는 인구의 최소 50%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초래한다. 책이 ‘세계는 왜 여성에게 맞지 않을까’라는 부제를 단 이유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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