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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경험도 대물림된다…‘라마르크’ 되살린 후성유전학

등록 2023-09-15 05:00수정 2023-09-15 11:11

미국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무어
후성유전학 최근 연구성과 안내
유전자. 게티이미지뱅크
유전자. 게티이미지뱅크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환경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유전체에 관한 행동 후성유전학의 놀라운 발견
데이비드 무어 지음, 정지인 옮김 l 아몬드 l 2만9000원

인간의 성격 발달에 끼치는 영향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에 흔히 등장하는 대립 구도가 ‘본성 대 양육’이다. 이 구도를 생물학적 언술로 바꾸면 ‘유전 대 환경’이 되는데, 생물학 영역에서 이 대립 구도를 새롭게 해명하는 분야로 후성유전학이 떠오르고 있다. 미국의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무어가 쓴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지난 20년 사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한 후성유전학을 소개하고 이 신흥 학문의 발견들에 담긴 함의를 두루 살피는 책이다.

20세기 말까지 유전에 관한 학설에서 주류를 이룬 것은 유전자(DNA)가 단독으로 생명체의 형질을 결정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었다. 이 유전자 결정론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 후성유전학이다.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면 이 단어의 머리에 붙은 ‘후성’(epi)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후성’이란 유전자 이후에 형성된 것, 그래서 유전자에 덧붙여진 것을 가리킨다. 쉽게 말해서 생명체를 둘러싼 환경 안에서 생명체가 겪은 경험을 뜻한다. 그 후천적 경험이 유전자와 함께 작용해 생명체의 형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후성유전학의 핵심 주장이다.

그러면 환경과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와 함께 작용하는가. 지난 수십년 사이 생물학은 유전자가 언제 어디서나 발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유전체 속의 유전자 각각은 일종의 전등과 같아서 스위치를 올리면 켜지고 스위치를 내리면 꺼진다. 유전자가 켜지거나 꺼지는 데 핵심 기능을 하는 것이 ‘메틸기’인데 이 메틸기가 유전자에 달라붙으면(곧 메틸화하면) 그 유전자의 기능이 꺼지고, 메틸기가 유전자에서 떨어지면(곧 탈메틸화하면) 유전자의 기능이 켜진다. 이 메틸기는 맥락과 상황에 따라, 다시 말해 생명체가 겪는 경험에 따라 유전자를 침묵시키기도 하고 활성화하기도 한다. 이 메틸화 또는 탈메틸화를 통해 생명체의 특성이 만들어진다. 후성유전학은 이렇게 유전자에 경험이 덧붙여져 형성되는 생명체의 특성을 설명하는 학문이다.

이 후성유전의 효과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일란성 쌍둥이다. 일란성 쌍둥이는 수정란 하나가 둘로 쪼개져 각기 따로 분화한 것이기에 유전자 구조가 완벽하게 똑같다. 그런데 이 쌍둥이의 후성유전 효과를 연구한 결과를 보면, 어린 쌍둥이일수록 그 효과의 패턴이 유사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점차 달라진다. 각기 다른 경험이 쌓이면서 패턴이 불일치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것이다. 쌍둥이 형제가 따로 살면서 다른 질병을 앓게 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더 직접적인 사례는 꿀벌에게서 볼 수 있다. 일벌과 여왕벌은 유전자상으로는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여왕벌은 일벌보다 몸집이 2배나 크고 수명은 20배나 길다. 또 일벌에게 있는 벌침과 꽃가루바구니가 여왕벌에게는 없다. 이런 차이는 애벌레 시기에 섭식이 다른 데서 온다. 일벌 애벌레와 달리 여왕벌 애벌레는 로열젤리를 먹는데, 로열젤리 속 단백질이 특정한 유전자를 활성화함으로써 애벌레를 여왕벌로 만드는 것이다.

캐나다 맥길대학 연구팀이 생쥐를 놓고 행한 연구는 이런 후성유전이 세대를 넘어 대물림되는 경우를 보여준다. 연구팀은 한쪽에는 새끼 쥐를 잘 보살피는 어미 쥐를 넣고, 다른 쪽에는 그렇지 않은 어미 쥐를 넣어 새끼를 기르게 했다. 새끼를 보살피지 않는 어미 쥐 밑에서 자란 새끼 쥐들을 보니, 뇌 속의 특정 유전자가 활성화되지 못했다. 그 결과로 이 새끼 쥐들은 어미 쥐를 닮아 자식 쥐를 돌보지 않는 경향이 더 컸다. 또 이 쥐들은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단백질을 더 적게 생산했고 그런 만큼 스트레스를 잘 견디지 못했다. 이렇게 스트레스에 취약한 새끼 쥐는 주의력이나 학습 능력도 떨어졌다. 이런 사례는 인간이 어린 시절에 학대나 방임을 당하면 그 경험이 성인기까지 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책은 자살자들의 뇌를 연구한 결과를 살피는데, 그 결과를 보면 학대를 경험한 자살자들의 경우에 뇌의 특정 부위 유전자에서, 일반 사고로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메틸화(유전자 비활성화)가 일어났다. 유전자 메틸화가 특정 유전자를 침묵시킴으로써 우울장애나 정신질환을 유발하고 그것이 당사자를 자살로 이끈 것이다.

미국의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무어. 위키미디어 코먼스
미국의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무어. 위키미디어 코먼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이런 후성유전의 효과가 세대를 넘어 대물림된다는 사실을 여러 사례를 통해 밝히는 대목이다. 이 책이 세심히 설명하는 사례는 부모의 경험이 ‘유전적인’ 방식으로, 다시 말해 정자와 난자로 이루어진 생식세포를 통해 직접 대물림되는 경우다. 이제까지 생물학 상식은 부모가 경험 속에서 얻은 후성유전 효과는 생식세포를 통해 후대로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 수정란이 만들어질 때와 그 수정란이 분화해 원시생식세포가 형성될 때 후성유전 효과가 모두 제거되기 때문이다. 마치 컴퓨터를 초기화하면 앞에 기록해두었던 정보가 다 사라지고 애초의 프로그램만 남는 것과 같다.

그러나 최근 생물학자들은 후성유전 효과가 생식세포를 통해 유전되는 확실한 사례들을 발견했다. ‘아구티 생쥐’라고 부르는 야생 생쥐에서 어미의 털 색깔이 유전적으로, 다시 말해 생식세포를 통해 새끼로 대물림되는 것이 그런 경우다. 이것은 후성유전 효과가 생식세포에서 다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학자들은 이렇게 후성유전 효과가 생식세포를 통해 대물림되는 현상이 이 경우 말고도 매우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여기에 더해, 새끼 쥐 양육의 경우에서처럼 ‘비유전적인’ 방식으로, 다시 말해 생식세포를 거치지 않고 어미 쥐에서 새끼 쥐로 후성유전 효과가 이어지는 것을 포함하면 후성유전의 대물림은 훨씬 더 많아진다.

이런 사례들은 19세기 프랑스 생물학자 라마르크가 주장한 ‘후천적으로 획득된 형질의 유전’ 학설을 떠올리게 한다. 라마르크의 학설은 20세기 초에 유전자 돌연변이가 개체 변이의 원인이라는 유전자 결정론의 비판을 받고 사라졌다. 그러나 최근의 후성유전학 연구는 유전자 결정론이 틀렸으며 라마르크 학설이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후성유전학의 이런 발견은 인간의 후천적 경험이 당대에 사라지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후대에 전달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유전학에 일대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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