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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끝내 미워하지 못하는 마음 [책&생각]

등록 2023-09-15 05:01수정 2023-09-15 09:56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l 문학동네(2023)

사랑. 10대에 쓴 일기장에는 온통 사랑 이야기가 가득해. 여자인 나는 남자만 사랑해야 한다고 믿던 시기여서 일기장 속 대상은 오로지 남자였어. 어떻게 사랑받고 싶은지, 결혼해서 어떤 집에 살고 싶은지 적었어. 크레파스, 색연필, 잡지에서 오린 글자들로 적은 ‘사랑’. 알록달록한 페이지로 채운 환상의 세계는 오래가지 않아. 꾸기고 찢은 종이, 거칠게 눌러쓴 글자들. ‘힘들다. 죽고 싶다. 씨발.’ 그때는 엄마가 집을 나간 시기였고, 나는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며 슬퍼하고 있었어. 엄마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고, 가족을 벗어나 행복하길 바라고, 우릴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간 엄마를 증오하고, 그만큼 그리워했어. 일기에 집착적으로 적은 사랑은 도피와 가까운 단어라는 걸 이제는 알겠어.

이혼한 뒤에도 엄마는 종종 나를 보러왔어. 몸에는 멍이 있었지. 그런 상태로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면 나는 사랑을 증오했어. 엄마를 미워했지. 이 모순은 그때부터 생긴 걸까. 고작 남자 때문에 나를 버릴 수 있는 여자를 미워하면서,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굴레에 갇힌 거 말이야. 삼십 대 중반이 된 지금, 나는 성별에 상관없이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게 되었어. 당시 일기장과는 멀어졌지만, 여전히 경계하는 마음이 있어. 여자를 쉽게 미워하는 마음. 폭력적인 남자보다, 그에게 헌신하는 여자를 미워하는 마음. 왜 그런 남자를 만나? 넌 내 말보다 그의 말을 더 신뢰하는 거야? 사랑해서 미워지는 걸까. 그저 증오일까. 나는 늘 궁금했어.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에서 너의 편지를 읽었어. 책에 실린 단편 소설 중 하나였지만, 나는 네가 작가의 몸을 빌려 말하고 있다고 느꼈어. 너에겐 일찍 죽은 엄마와 그 자리를 대신한 언니가 있어. 언니는 아빠에게 온갖 상처를 받으면서 네 곁을 지켜주는 절대적 존재였어. 어느 날 고등학생인 언니가 위험한 남자를 만나는 걸 알게 되었어. 너는 언니를 걱정하지. 임신한 언니가 어린 나이에 그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그의 가족과 그가 언니를 대놓고 무시할 때, 너는 표정을 숨길 수 없었지. 그때 언니는 말해. “나한테 이렇게 잘해준 사람은 없었어.” 그 말을 듣고 넌 언니의 상처를 피부로 느끼면서도 무력감을 느꼈다고 했지. 너는 무력감과 걱정, 실망, 분노, 배신감, 지켜야 한다는 결의 속에서 혼란에 빠져. 그는 결국 언니와 너에게 큰 상처를 줘. 언니를 지키고 싶었던 너는 그에게 저항하고, 네가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조차 언니는, 끝내 그의 편을 들어.

끝내. 넌 언니를 미워하지 않아. 그러지 못해. 그저 언니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스스로 질문하지. 나는 왜 그랬을까. “때때로 사랑은 사람을 견디지 못하게 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게 하니까.” 나는 사랑이 뭔지 계속 모를 테지만, 미움 아래 숨은 감정이 사랑과 비슷하다는 건 알겠어. 나는 여자를, 헌신하는 마음을 미워하는 게 아니었어. 사랑하는 만큼 상대가 소중하게 대해지길 바라던 거였어. 내가 그토록 외부에서 찾던 환상 속 사랑은 이미 내 안에 있었어. 엉망진창으로 망가지고, 상처 입고 입히고, 혼란스러워하는 마음 안에. 끝까지 미워하지 못한, 그 마음을 사랑으로 번역한 너에게 고마워.

홍승은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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