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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유일자’ 슈티르너 “국가는 나의 적이다”

등록 2023-09-22 05:00수정 2023-09-22 10:13

19세기 독일 아나키즘 선구자
슈티르너의 문제적 저작 우리말로

유일자란 고유한 존재인 나 자신
개인 위에 군림하는 국가·신 거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그린 청년헤겔파 그림 ‘자유인’. 담배를 물고 있는 사람(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이 막스 슈티르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그린 청년헤겔파 그림 ‘자유인’. 담배를 물고 있는 사람(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이 막스 슈티르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유일자와 그의 소유
막스 슈티르너 지음, 박홍규 옮김 l 아카넷 l 3만3000원

아나키즘은 19세기에 급진적 혁명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마르크스주의와 맹렬히 다투었다. 그 아나키즘 운동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 독일 철학자 막스 슈티르너(1806~1856)다. 슈티르너는 자신의 아나키즘 사상을 한 권의 저작에 집약했는데,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주장의 극단성과 과격성 탓에 오랫동안 외면받다가 근년에 다시 주목을 끌고 있다. 슈티르너의 이름과 등치되는 이 저작이 아나키즘 사상을 소개해온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의 손으로 번역됐다. 지난 2월 먼저 출간된 슈티르너 전공자 박종성 건국대 교수의 번역본과 비교해 읽어볼 만하다.

슈티르너의 일생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플루트 제작자였던 아버지는 슈티르너가 한 살 때 병사했고, 어머니는 뒤에 정신병에 걸려 아들에게 큰 짐이 됐다. 스무 살 슈티르너는 베를린대학에 들어갔지만 결핵으로 중도에 학업을 중단했고 8년여 만에야 대학 과정을 겨우 마쳤다. 두 번의 결혼도 행복한 삶을 열어주지 못했다. 첫 부인은 아이를 낳던 중 세상을 떠났고, 두 번째 부인도 불화 끝에 3년 만에 떠났다. 이후 슈티르너는 생계를 꾸리려 이런저런 일에 손을 댔으나 모두 실패하고 빚쟁이가 돼 두 번이나 감옥살이를 한 끝에 쉰에 삶을 마쳤다.

슈티르너의 불운한 삶에 잠깐 빛이 든 때가 있었는데, 1839년부터 1844년까지 베를린의 사립 여학교 교사로 있던 시절이었다. 1842년부터 슈티르너는 ‘청년헤겔파’ 사람들과 어울렸다. ‘자유인’이라는 이름의 급진주의자 모임이었는데, 맥주홀에서 열린 그 모임에는 슈티르너보다 먼저 마르크스가 참여했고, 마르크스가 떠난 뒤 엥겔스가 동참했다. 엥겔스는 슈티르너를 침묵 속에 시끄러운 논쟁을 지켜보는 인물로 묘사한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그 시절 슈티르너가 청년헤겔파의 토론을 들으며 써 내려간 책이 바로 ‘유일자와 그의 소유’(1844)다.

엥겔스는 처음에 슈티르너 책을 읽고 그 주장에 동조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크스와 함께 슈티르너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가 됐다. 두 사람은 ‘독일 이데올로기’(1845~1846)에서 책의 절반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을 슈티르너 주장을 비판하는 데 바쳤다. 슈티르너의 사상이 그만큼 강력했다는 방증이다. 슈티르너의 책은 30년 뒤 젊은 프리드리히 니체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바젤대학 교수이던 니체는 그 책을 읽고 난 뒤 “홉스 이후로 가장 용감하고 철두철미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국가와 종교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유일자’를 내세우는 슈티르너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다. 슈티르너가 주장한 유일자가 뒷날 니체 사상 속에서 변모해 초인(위버멘슈)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도 있다.

슈티르너가 말하는 유일자(der Einzige)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자’라는 뜻이다. ‘나’ 곧 에고가 슈티르너의 유일자다. 다른 무엇도,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나’의 존재다. 머리말에서 슈티르너는 말한다. “나에게는 나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도 없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는 한 편의 기나긴 에고이즘 선언문이다. 이때의 에고이즘은 자아중심주의 혹은 자기중심주의를 뜻한다. 또 책 제목이 말하는 ‘소유’(Eigentum)란 당대 부르주아의 사적 소유, 곧 재산 소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고유한 것’, 다시 말해 자유‧생명‧주권 같은 본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어떤 외부의 힘도 나의 자유, 나의 생명, 나의 주권을 침탈할 수 없다는 선언인 셈이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쓴 독일 철학자 막스 슈티르너. 위키미디어 코먼스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쓴 독일 철학자 막스 슈티르너. 위키미디어 코먼스

슈티르너가 생각하는 ‘나’라는 유일자를 좀더 실감 나게 이해하려면 이 말에 대응하는 것들을 마주 세워볼 필요가 있다. 슈티르너는 신과 정신과 국가를 거론한다. 기독교의 신은 오랫동안 유일한 주권자로 인간 위에 군림했다. 슈티르너는 그 신의 자리에 ‘나’를 세운다. 마찬가지로 슈티르너의 ‘나’는 정신과 대립한다. 이때의 정신은 기독교 신의 철학적 표현이라 할 헤겔의 절대정신을 가리킨다. 모든 것을 아우르고 지배하는 그 정신의 손아귀에서 나를 구출하려는 투쟁의 기록이 이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신이 기독교 신의 철학적 형태라면 국가는 그 신의 세속적 형태다. 국가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보여주는 대로 지상에 군림하는 신이다. 그 국가야말로 슈티르너의 진정한 적이다. 슈티르너는 말한다. “내 고유한 의지는 국가를 파괴하는 것이다.” 여기서 슈티르너의 아나키즘 사상이 분명한 형체를 드러낸다.

그러나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슈티르너는 한발 더 나아가 ‘나’를 ‘인간’에 대립시킨다. 이때 슈티르너가 염두에 두는 것이 청년헤겔파의 선도자였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다.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의 본질’(1841)에서 기독교 신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그 신의 자리에 인간 곧 인류를 놓는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의 사랑을 실현하는 길이다. 슈티르너는 포이어바흐의 ‘인간’은 추상태에 지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나’뿐이라고 단언한다. 인간을 앞세우게 되면 결국 그 추상적 개념이 ‘나’를 지배하고 집어삼키게 된다. 슈티르너가 이 책 제1부의 주제를 ‘인간’으로, 제2부의 주제를 ‘나’로 잡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맞서 ‘나’라는 구체적 개별자를 내세우는 것이다. 결론에서 슈티르너는 말한다. “신이건 인간이건 내 위에 있는 모든 상위의 본질은 나의 유일성을 약화시킨다. 나는 유일자인 나 자신에게만 관심을 둔다.” 내 위에서 나를 지배하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는 선언이다.

기억할 것은 슈티르너가 말하는 에고이즘이 이타주의와 대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도 물론 인간을 사랑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에고이즘의 의식으로 그들을 사랑한다.” 이타주의는 에고이즘의 한 형태이지 그것의 부정이 아니라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슈티르너는 사람과 사람의 연대 혹은 연합도 긍정한다. 이때의 연합은 집단의 힘으로 ‘나’를 억누르지 않는 방식의 연합, 곧 유일자들의 연합이다. 평등한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연대하여 만든 비지배적 연합사회가 슈티르너가 생각한 이상적인 미래 사회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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