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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앗, 이 소설이 ‘종교’ 코너에…목사님은 날 찾지 않았고 [책&생각]

등록 2023-09-22 05:00수정 2023-09-22 10:32

나의 첫 책 │ 소설가 이기호

첫책 20주년 앞둔 작가 이기호
불교→기독교→문학 ‘개종’ 거듭
‘믿음’과 소외사회 경쾌한 조롱
“출간 뒤 한번도 펼치지 못했지만…”
이기호식 ‘해학적 사실주의’ 신호탄
내년 출간 20주년이 되는 이기호 작가의 첫 책 ‘최순덕 성령충만기’(소설집)는 제목 때문에 종교 코너에 진열되기도 했다. 사진 작가 제공
내년 출간 20주년이 되는 이기호 작가의 첫 책 ‘최순덕 성령충만기’(소설집)는 제목 때문에 종교 코너에 진열되기도 했다. 사진 작가 제공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자라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할머니 손잡고 가평 운악산 현등사를 종종 찾았고, 구구단 외울 무렵부터는 아버지와 함께 치악산 초입에 있는 국향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집안 분위기로만 보자면 나는 ‘절 오빠’가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하여간 아이들 인생 망치는 데 ‘친구’만 한 것이 또 없어서, 망할 우정 덕분에 고등학교 입학 무렵 기독교로 개종했다(이상하게도 친한 친구들이 모두 교회에 다녔다).

원래 주사파든 보수 원조든, 개종한 친구들이 가장 악랄한 법. 그때부터 성경책을 제법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계속 낳는 부분만 무사히 넘어가면 성경책은 꽤 드라마틱하고 서사가 강렬한 이야기책이었다. 성경책만 열심히 읽은 것은 아니었고, 금요 철야기도도 부흥회도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한번은 ‘이단’ 아우라가 물씬 풍기는 교회의 부흥회를 찾아갔는데, 그날 부흥강사(5대5 가르마에 하얀 양복, 백구두를 신은 분이었다)가 그 많은 사람 중 하필 나를 콕 집어 앞으로 나오게 했다. 그러곤 지금부터 ‘하나님이 살아 계신 산 역사’를 직접 선보이겠다며, 여기 나와 있는 학생(그러니까 바로 나!)의 다리 위로 뱀이 기어 다니도록 만들겠다고 선언했다(아니, 하나님이 뱀이랑 도대체 무슨 관계이기에!). 그때부터 그 부흥강사는 내 다리를 붙잡고 열렬히 기도하기 시작했고, 거기 모인 사람들 역시 덩달아 내 다리 위에 뱀이 나타나라고 한마음 한뜻으로 외쳐댔다. 시간이 지나도 내 다리 위론 뱀은커녕 모기 한 마리 앉지 않았고, 그러자 정작 불안해진 것은 나 자신이었다. 많은 사람의 기대와 ‘하나님이 살아 계신 산 역사’가 나로 인해 송두리째 부정당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움찔, 하고 말았다(그때 나는 제단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움찔, 또 한 번 움찔. 그렇게 몇 번 뒤척이자 정말이지 내 다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부흥강사는 나의 미동에 더 큰 목소리로 “주님”을 부르짖기 시작했고, 나는 엉겁결에 내 다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고통에 찬 연기를 ‘시전’하게 되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절로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 일화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신학대학교에 진학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실패했고(집안 난리가 났었다), 차선으로 선택한 곳이 문예창작과였다(나름 문장력이 나쁘지 않았다. 다 성경책 덕분이었다). 그곳에서 또 한 번 개종하게 되었는데(이번엔 ‘문학’이었다), 거기에서 들은 ‘한국 시의 무덤은 불교요, 한국 소설의 무덤은 기독교’란 말이 새로운 경전이 되었다. 한번 돌아서고 나니 자꾸 한국 기독교와 교회의 부정적인 면모만 눈에 들어왔고, 소설도 자꾸 그쪽 방향으로만 나아갔다(하여간 이래서 개종한 친구들과는 상종을 말아야 한다).

내 첫 책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거기 나오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한국 교회가 싫어하는 양아치, 부랑자, 성도착증 남자, 간첩 등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소설 제목 때문이었는지, 처음엔 교보문고 ‘종교’ 코너에 그 책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후에 아내(독실한 기독교 신자다)의 손에 이끌려 만나게 된 동네 목사님 역시 내 첫 책 제목을 들으시곤 “아아, 제목만 들어도 너무 좋네요. 성도님, 제가 꼭 읽어보겠습니다”라고 말해서 나를 긴장시켰다(정말로 읽으셨는지 그 뒤론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으셨다).

나는 첫 책이 나온 이후, 단 한 번도 그 책을 펼쳐보지 않았다. 너무 서툴고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여지없이 보여서(소설은 그렇게 쓰면 안 된다), 제대로 눈을 둘 곳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그 책을 볼 때마다 없는 뱀을 두려워하던,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연기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그게 매번 섬뜩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아무 잘못 없었다.

이기호 소설가

■ 그리고 다음 책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아내에게 결혼 선물로 주려고 급하게 낸 책이었는데, 표제작이 저렇게 뽑히는 바람에 난처해져버린 기억이 있다. 그래도 준비한 선물이니까, 결혼식 전날 슬쩍 내밀었더니 아내의 눈이 금세 붉게 변해버렸다. “이게 딱 내 마음이야.” 아내는 먼저 그렇게 말했다. 처음엔 그게 좀 서운했는데, 돌아보니 소설가와 결혼을 앞둔 상대방에겐 더할 나위 없는 책 제목이었다. 번민, 좌절, 후회 같은 것.

문학동네(2006)

김 박사는 누구인가?

광주에 내려와 살면서 쓴 첫 번째 단편집. 누가 강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변해야 한다는 정언명령 같은 것을 품고 살았는데, 그게 어디 쉽나? 하동 칠불사 옆 산방을 구해 겨우내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써내려갔다. 하루는 보일러가 고장 났는지 계속 신호음이 들렸다. 신경 쓰지 않고 노트북만 보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보일러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새 한 마리가 내 방에 들어와서 계속 울어댄 것. 그 새가 내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남들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나 자신을 가장 큰 폭으로 변화시킨 소설들.

문학과지성사(2013)

차남들의 세계사

내가 나고 자란 원주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오래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지학순 주교님이 이사장으로 있던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거기에 이상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다. 그분들에게서 들은 은밀한 이야기, 최기식 신부님과 문부식 선생에 대한 이야기. 그 이야기를 꼭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료 조사에서부터 탈고까지 정확히 4년이 걸린 소설. 야밤에 광주에서 원주까지 차를 몰고 가 봉산동 원주 교구 교육관 주변을 오래오래 걸어 다닌 기억이 있다.

민음사(2014)

눈감지 마라

제자들을 위해 쓴 소설이고, 제자들의 입을 빌린 소설이다. 코로나 정국을 지나면서 응원하고 싶은 마음, 위로하고 싶은 마음으로 썼는데, 결과적으론 둘 다 실패하고 말았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누군가를 응원하고 위로한다는 게, 그게 다 기성세대의 위선이고 권력이고 허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직하게 우리가 저지른 짓들을 보자는 마음으로 썼다. 거기에는 물론 나 역시 포함되어 있다.

마음산책(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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