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유준은 ‘광절교론’에서 우정을 크게 소교(素交·순수해서 변함없는 우정)와 이교(利交·이익을 좇는 장사치의 우정)로 나누고, 이교를 다시 다섯 종류로 나눕니다. “권세 있는 사람에게 딱 붙는 세교(勢交)와 재물 있는 자에게 결탁하는 회교(賄交), 입만 살아서 한몫 보려는 담교(談交), 궁할 때는 위하는 듯하다가 한순간에 등을 돌려 제 잇속을 차리는 궁교(窮交), 무게를 달아서 재는 양교(量交) 등”(정민, ‘서양 선비, 우정을 논하다’)입니다.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가치라지만, 우정은 이다지도 어렵습니다. 키케로는 “사랑이 없이도 유지되는 친족과 달리 벗은 사랑이 없으면 될 수 없기에 벗이 친족보다 귀하다”고 했다던가요. 하늘이 맺어주는 관계와 달리 벗은 인간 스스로 수평적인 만남 속에 맺는 관계라, 그 관계의 양태가 일견 자유로울 것 같지만 되레 더 까다롭습니다. “벗은 한 영혼이 두 몸에 사는 것이다”, “벗의 물건은 모두 공유해야 한다” 등 옛 금언들이 강조하는 우정의 높은 경지는 과연 평범한 우리 인간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탄식마저 불러일으킵니다.
과연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가 소교와 이교를 구분하고 진정한 벗이란 뭔가 따지고 들었던 옛 사람들처럼 우정에 ‘진심’일 수 있을까요? 연령이건 지역이건 취미이건 대체로 같은 환경과 조건을 공유한다는 이유로 반자동적으로 맺어지는 관계들에 익숙해지고 때론 매몰되어가는 오늘날, 그래서 되레 ‘다른 것’들에는 위계와 차별을 손쉽게 들이대는 오늘날, 우정이라는 오랜 가치를 다시금 발굴하고 새롭게 제련해내는 일은 그만큼 절실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최원형 책지성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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