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거리
역사학자 정병준은 ‘1945년 해방 직후사’(돌베개)에서 해방 직후 미군정이 집행했던 정치자금의 규모를 따져봅니다.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할 목적으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된 1946년 5월, 미군정은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한다고 했지만 각 정치인들에게 건넨 미군정의 정치자금은 전혀 다른 얘기를 한다는 겁니다.
당시 친일파 중심의 ‘대한경제보국회’라는 단체는 대출을 받아 이승만에게 1000만원의 정치자금을 건넸는데, 이는 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의 특별명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는 ‘좌우합작운동에 쓰라’며 김규식에게도 정치자금을 건넸는데, 그 금액은 이승만에게 건넨 돈의 3분의 1도 못 되는 300만원에 그쳤습니다. 좌우합작운동의 다른 일방이었던 여운형에게는 한푼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시기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원들에게 위조지폐 240만원어치를 찍어냈다는 누명을 씌워 탄압한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을 일으킵니다. 정리하자면, “미군정은 이승만에게 +1000만원, 김규식에게는 +300만원, 김구와 여운형에게는 0원, 박헌영에게는 -240만원을 제공”한 셈이란 겁니다.
미군정이 정치세력마다 다르게 줬던 정치자금 규모의 차이, 그러니까 정치권력을 불하(拂下)했던 원칙은 오늘날 한국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제는 거기서 과연 어떤 합리성을 찾을 수 있는지, 더 나아가 광범위한 인민 대중의 뜻과 일치하는지 여부이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아무도 아닌 자”들에게 규정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최원형 책지성팀장 circle@hani.co.kr
서울 시민 주최 연합군환영대회(1945년 10월20일) 당시 아치볼드 아놀드 군정장관(가운데)과 존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아놀드의 왼쪽), 그리고 하지의 ‘문고리 권력’이었던 통역관 이묘묵(아놀드 오른쪽)의 모습. ⓒNARA 돌베개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