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인제군 꽃풀소 보금자리에서 ‘소 돌보미’ 가족인 가야(5·오른쪽)가 꽃풀소 ‘메밀’에게 바나나를 먹이고 있다. 바나나는 꽃풀소들의 인기 간식이다. 류우종 기자
“도살 직전에 있던 축사에서 구조된 6명의 홀스타인 종 남성 소들은 강원도 인제군 ‘달 뜨는 마을’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었다.”
김도희 변호사의 책 ‘정상동물’을 읽는 내내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인용한 문장이 보여주듯,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언어 습관에 수시로 제동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언어 표현과 형식 차원의 불편함은 오히려 약과였습니다. 맛이 있어서, 또는 영양이 풍부하다는 이유로 ‘고기’를 즐겨 먹는 제 식습관이야말로 이 책을 읽는 일을 힘들게 했습니다. 육식이란 영양학적 근거가 미약한 한갓 이데올로기일 뿐이며 기후위기의 주범이기도 하다고 지은이는 주장합니다.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채식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저와 망설임의 바탕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요.
“자연의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고, 먹고 먹히는 행위는 일종의 생태계 순환이므로, 어떤 삶의 시작에는 반드시 어떤 죽음이 선행된다”고 지은이 역시 쓰고 있습니다. 육식을 중단하고 채식으로 바꾸더라도 식물이라는 생명체를 죽여서 섭취한다는 본질에는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대로 육식은 살생이고 채식은 살생이 아닌 걸까요. 고통을 느끼고 죽음을 인식하는 데에서 동물에 비해 식물이 열등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식물의 놀라운 능력과 지혜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지금 이 순간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물과 식물을 차별하는 일은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는 일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요.
이런 생각은 아무래도 육식에 대한 미련을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이겠지요. 육식의 매혹과 채식의 당위 사이에서 수시로 흔들리며 책을 읽고 기사를 써야 했습니다. 당신은 어떠신지요?
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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