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한겨레 ‘올해의 책’—번역서 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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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진행이 곧 역사의 진보로 이어진다는 순진한 믿음을 버린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날이 갈수록 세상은 더 나빠지고 살기는 더 팍팍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지난해가 제시한 숙제를 미처 마치기도 전에 올해는 또 새로운 숙제를 우리 앞에 들이민 듯한 느낌입니다. 그렇게 풀지는 못하고 쌓이기만 하는 숙제를 어떻게든 풀어 보고자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속에 정답이 모두 들어 있지는 않다고 해도 문제를 풀기 위한 실마리는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한겨레’ 책지성팀이 1년 동안 읽고 소개한 책들 가운데에서 스무 권을 ‘올해의 책’으로 골라 보았습니다. 국내 저자의 책 10권과 번역서 10권으로 나누었고, 특정 분야나 출판사에 쏠리지 않도록 안배도 했습니다. 책을 고르면서 새삼 책을 쓰고 만들고 읽어 준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사코 나빠지려고만 하는 세상에 그나마 제동을 걸어 주는 게 곧 여러분들이라고 믿습니다.
한겨레 책지성팀
존엄 박탈당한 엄마를 되살리다
그레이스 M 조 지음, 주해연 옮김 l 글항아리 백인 미국인 부친과 한국 기지촌에서 일하던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의 한인 2세 사회학자·인류학자 그레이스 조가 여성, 성노동자, 이민자, 조현병 등으로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차별과 고통 속에 살았던 어머니의 삶을 회고한 책이다. ‘양공주’란 이유로, 소수 인종이란 이유로, 어머니는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성차별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권력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박탈당했다. 지은이는 “결코 살아남을 운명이 아니”었던 어머니의 ‘사회적’ 죽음을 파헤칠 뿐 아니라, 죽음을 앞둔 어머니에게 그가 먹고 싶어했던 음식들을 요리해주며 회복, 치유, 위로 같은 가능성을 찾아낸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소도미법’ 폐지 이끈 그 책
성적 다양성과 섹슈얼리티의 과학
브루스 배게밀 지음, 이성민 옮김 l 히포크라테스 캐나다 출신의 생물학자이자 언어학자인 브루스 배게밀이 쓴 동물 섹슈얼리티에 대한 최초의 백과사전. 135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1999년에 출간됐지만 이제야 국내에 소개됐다. 이 책은 미국 동성 간 성행위를 처벌하는 내용을 담았던 ‘소도미법’ 폐지 판결(2003년)과 인도 대법원의 동성애 비범죄화 판결(2018)에도 인용될 정도로 논거가 탄탄하다. 저자는 과학자들이 지난 200년 동안 동물 동성애를 연구하면서 얼마나 많은 선입견을 보여줬는지 분석하면서, 190여 종의 포유류 및 조류, 파충류, 양서류, 어류, 곤충 등 동물 동성애를 사실에 기초해 다룬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경계를 넘는 예술 여행
가와우치 아리오 지음, 김영현 옮김 l 다다서재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 매년 수십 번씩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감상하고, 산책을 하며 찍은 사진들을 전시하고, 자신의 일상생활을 작품으로 내건다. 반사적으로 ‘그게 가능해?’ 묻는 사람들에게, 일본의 논픽션 작가가 ‘전맹(全盲) 미술 감상자’인 시라토리 겐지(54)와 함께 미술관 탐방을 했던 경험을 담은 이 책을 꼭 보길 권한다. 눈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의 존재와 감각은 저마다 다른데, 거기에 어떤 높낮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책은 있어야 할 것은 위계와 차별이 아니라 오직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여정을 공유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해준다. ‘함께하기’의 따뜻함도 깊은 울림을 준다. 최원형 기자
광활한 아리스토텔레스 세계로 낸 문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조대호‧유재민‧김재홍‧임성진‧김헌 옮김 l 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분야는 넓고도 넓어서 인간과 자연과 우주를 포함해 거의 모든 주제를 망라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선집’은 현전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집 가운데 주요한 부분을 발췌해 번역한 책이다.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를 비롯해 아리스토텔레스 전문가 다섯 사람이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발췌 번역이라고는 해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둘러싼 핵심 논점이 된 대목들이 거의 빠짐없이 들어가 있어 이 선집만으로도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광활한 세계를 조망할 수 있다. 형이상학자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논리학자‧자연철학자‧실천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두루 만날 기회를 준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착취자들의 그린 뉴딜은 가라
제3세계 생태사회주의론
맥스 아일 지음, 추선영 옮김 l 두번째테제 잘사는 나라들에서 기후위기 해결을 위해 제시하고 있는 ‘그린 뉴딜’들은 과연 전 인류와 지구를 위한 것일까? 세계체제 중심부-주변부 사이 착취 구도를 직시하는 ‘종속이론’을 자원으로 삼아, 튀니지 출신 농업사회학자 맥스 아일은 북반구 중심의 그린 뉴딜들이 기후위기에 대한 책임을 ‘전 인류’로 돌리고 전환의 부담을 되레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과하려 한다고 까발린다. 지은이는 자본주의-제국주의적 착취에 대한 배상(기후 부채 상환)과 민중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정치·경제적 틀(국가/민족)을 중심에 놓는 ‘민중을 위한 그린 뉴딜’을 주창한다. 또 대전환은 농업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최원형 기자
“고급 창녀가 되고 싶다”
이치카와 사오 지음, 양윤옥 옮김 l 허블 견고한 현실은 문학으로 붕괴된다. 그간 부재했던 주제, 부재했던 작가 범주를 일거에 무너뜨린 일본 소설. 지난 7월 아쿠타가와상 수상과 함께 현지 출판계가 들썩였다. “다시 태어난다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거나 “임신과 중절을 해보고 싶다”는 장애 여성 주인공 샤카의 위악적 소망을 소설은 형상화한다. 스스로 ‘꼽추 괴물’로 부르는 샤카는 14살 때부터 인공호흡기를 달고 산 작가 이치카와 사오(44) 자신과 다르지 않다. 연애, 판타지 소설 등을 써온 이치카와가 작정하고 아쿠타가와상을 노려 쓴 정통 소설이다. 생명 윤리에 도전하는 작가는 한국 독자에게 그저 “삐딱한 주인공에 부디 큭큭큭 웃어주시길 바란다”고 썼을 뿐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동서 만남 아우른 세계철학사
이토 구니타게·야마우치 시로·나카지마 다카히로·노토미 노부루 책임편집, 이신철 옮김 l 도서출판b ‘세계철학사’(전 9권)는 일본의 철학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대작이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전공자 115명이 대거 합류해 해당 영역의 집필을 맡았다. 집필진은 이 저작을 일본에 서양 철학이 들어온 지 150여년 만에 처음으로 감행한 본격적인 ‘세계철학사’ 구축 시도라고 자평한다. 일본 철학계가 축적한 역량을 가늠해볼 수 있는 작업이다. 기원전 6세기부터 21세기까지 인류가 창출한 철학적 사유를 망라했다. 철학의 흐름을 문화권마다 살펴 나열하던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공동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삼아 각각의 사유를 횡으로 비교함으로써 동시대 철학적 사유의 공통성과 독자성이 드러나도록 했다. 고명섭 선임기자
유전학의 일대 변혁, 후성유전학
데이비드 무어 지음, 정지인 옮김 l 아몬드 20세기 말까지 유전에 관한 학설에서 주류를 이룬 것은 유전자(DNA)가 단독으로 생명체의 형질을 결정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었다. 이 유전자 결정론에 반기를 들고나온 것이 후성유전학이다. 미국의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무어가 쓴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지난 20년 사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한 후성유전학을 소개하는 책이다. 최근의 후성유전학 연구는 유전자 결정론이 틀렸으며 라마르크의 ‘획득형질 유전설’이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후성유전학 발견은 인간의 후천적 경험이 당대에 사라지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후대에 전달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유전학에 일대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고명섭 선임기자
‘지도 밖 팔레스타인’의 심연
아다니아 쉬블리 지음, 전승희 옮김 l 강 징후로서의 문학을 증명한다. “염소도 다른 염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아는데, 인간은 왜 그러질 못하지요?”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49)의 말이다. 이 소설에 10여년 품을 들인 배경. 건국 선언(1948) 이듬해 이스라엘의 군이 국경지대에서 한 아랍 소녀를 강간 사살한 과거와 이 사건의 실체를 좇는 21세기 팔레스타인 여성의 현재가 중첩한다. 세밀한 심리적 소요에 대한 핀셋 번역. 소설은 결국 올해 터진 하마스-이스라엘 전쟁과 중첩되고 만다. “지도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우는 일은 오늘도 계속” 된다던 쉬블리는 이 작품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리베라투르’ 상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시상식은 취소됐다. 임인택 기자
32년 만에 완역된 기념비적 저작
한국전쟁의 기원2-1, 2-2: 폭포의 굉음 1947~1950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l 글항아리 한반도 전역을 폐허로 만들고 한반도 민중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긴 한국전쟁은 언제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은 이 문제에 관한 가장 심층적이고 발본적이며 선도적인 저작으로 꼽힌다.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한국전쟁 연구서로 평가받는 기념비적 저작이다. 완간 후 32년 만에 완역된 한국어판은 전체 3권에 모두 20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커밍스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1945년 이후 이 유서 깊은 나라를 경솔하고 분별없이 분단시킨 미국”의 잘못을 추궁하면서 “한국을 분단시킨 것이 내 조국이었기 때문에 나는 늘 책임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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