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로버츠(왼쪽)와 리처드 기어(오른쪽)가 주연한 영화 ‘귀여운 여인’ 스틸컷. ‘사랑을 재발명하라’의 지은이 모나 숄레는 이 영화가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기반해 있으며 의존적 여성상을 부추긴다고 비판한다.
사랑을 재발명하라
가부장제는 어떻게 우리의 사랑을 망가뜨리나
모나 숄레 지음, 백선희 옮김 l 책세상 l 1만8800원
“남자와 여자의 애정 관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 사랑한다고 가정되는 사회적 지배 관계일 뿐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스위스 출신 프랑스 기자이자 작가인 모나 숄레의 책 ‘사랑을 재발명하라’에 인용된 여성 학자들의 말이다. 숄레 역시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냉정하게 고려해보면 이성애는 착오다.” 이것은 숄레 자신이 쓴 문장이다. 이성애가 착오라는 판단이 동성애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프랑스의 레즈비언 소설가 겸 영화감독 비르지니 데팡트처럼 “나는 이성애적 유혹과 그것의 일방적인 강요에서 해방되었다!”고 홀가분하게 외칠 법도 하다. 그렇지만 숄레는 이 동료 여성들의 비판과 선언에 흔쾌히 동참하지 못한다. “이 책은 나의 뒤죽박죽인 개인적 감정에서 탄생했다”는 고백처럼, 그는 이성애에 대한 비판과 그럼에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그에 대한 미련 사이에서 곡예를 하듯이 글을 써 나간다.
숄레는 ‘마녀’ ‘지금 살고 싶은 집에서 살고 있나요?’ 같은 책들이 국내에도 번역돼 있는 페미니스트 작가다. 2021년작인 ‘사랑을 재발명하라’에서 그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이성애를 구출해 내기 위한 힘겨운 모험을 펼친다. 그 과업을 위해 그는 우선 이성애를 가부장적 이성애와 ‘깊은 이성애’ 둘로 나눈다. 가부장적 이성애는 현실에 널리 퍼져 있는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이성애이고, ‘깊은 이성애’는 “가부장제 및 그 이해관계와 결별하는 이성애, 즉 가부장제를 배반하는 이성애를 의미한다.”
‘깊은 이성애’라는 말은 미국의 여성학자 제인 워드가 자신의 책 ‘이성애의 비극’(2020)에서 쓴 표현이다. 워드는 “나는 이성애의 비극에 좌절하지 않는다. 다른 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라고 그 책에 썼는데, 그가 말하는 ‘다른 길’과 ‘깊은 이성애’ 개념을 받아서 숄레 역시 이렇게 제안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고려하는 방식의 경기 규칙을 바로잡고, 강제된 도정이라는 부르주아적 굴레와 파괴적 열정이라는 관습적이고 제한적인 굴레를 동시에 분쇄하여 사랑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다.”
‘사랑을 재발명하라’의 지은이인 프랑스의 기자 겸 작가 모나 숄레.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성애에 깊이와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먼저 잘못된 규칙을 고치고 부당한 굴레를 깨부숴야 한다. 그를 위해 숄레는 여성과 남성에게 서로 다른 기호를 각인시키는 문화적 관습을 문제 삼는다. 가령 키가 크거나 힘이 세거나 지적으로 뛰어난 여성은 많은 남성들에게 그다지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돈을 잘 버는 여성들, 오스카상을 받은 여배우들, 선거에 당선된 여성들, 경영자 위치에 오른 여성들이 그렇지 않은 여성들보다 이혼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통계도 있다. 남성이 지배적이고 여성은 복종적이어야 한다는 통념에 반하는 여성들의 성취가 이성애를 위협하는 것이다.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적 지위’가 ‘성적 지위’를 망친 셈이다.
지배와 복종에 관한 통념은 남성의 폭력을 대하는 일그러진 태도로 이어진다. 이성애 관계에서 여성 파트너에게 행사하는 남성의 폭력에는 자주 동화와 공감의 프리즘이 동원되고, 피해자인 여성에게는 이해와 희생이 요구된다. 폭력의 가해자인 남성이 피해자인 여성보다 더 많은 지지와 공감을 받는 현상을 철학자 케이트 만은 ‘힘패시’(himpathy, him + sympathy)라는 신조어로 겨누었다. 심지어는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갇힌 남성에게 매력을 느끼고 사랑을 고백하는 여성들의 사례도 적지 않다. ‘살인자를 사랑하는 여성들’의 지은이 실라 아이젠버그는 그것이 폭력과 살인을 에로틱한 남성적 매력으로 보이게 만드는 가부장제 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아니요’를 감추어진 ‘네’로 이해하고, 여성들의 분노와 저주를 가식과 초대로 받아들이는 ‘강간 문화’와 그런 문화를 부추기는 대중문화의 표현들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대중문화는 남성에게 독신에 대한 향수를, 남자들끼리의 여가활동을, 더 젊은 여자들과 생식과 무관한 성관계를 꿈꿀 욕망에 불을 지핀다.” 숄레는 “가정 착취의 낭만화를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로 영화 ‘러브 액츄얼리’를 들고,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기반한 영화 ‘귀여운 여인’은 의존적 여성상을 부추긴다며 비판한다. ‘깊은 이성애’의 전제는 착취와 의존의 사슬을 끊고 자립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연애 관계에서 흔히 여성은 남성에 비해 더 많은 관심과 에너지를 쏟고, 그런 모습은 의존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성이 감정적이고 애정을 갈구하는 반면 남성은 냉정하고 독자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것을 여성 특유의 모성의 욕구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지만, 숄레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한 남자와의 결혼에 자신의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를 의탁해야 했던 여성들의 오랜 경험이 남긴 ‘의존의 흔적’이라고 본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 지금이라고 완전히 개선된 것은 아니다.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보다 심한 경제적 불안에 시달리고 있고, 그것이 이성애 관계에서 그들이 보이는 의존 및 집착과 무관하지 않다.
줄리아 로버츠(오른쪽)와 리처드 기어(왼쪽)가 주연한 영화 ‘귀여운 여인’ 스틸컷.
이렇듯 “우리가 이성애적으로 여기도록 배우는 것이 사실은 ‘남성을 위한 또는 남성에 의한 성’” 그러니까 가부장적 이성애라면, 숄레가 그 반대항으로 제시하는 ‘깊은 이성애’는 어떻게 가능할까. 책에서 그에 관해 풍부한 사례나 희망적인 전망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서로 다른 집에 거주하며 최소한의 독립성을 확보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윌리엄 고드윈 부부와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 부부의 사례가 모범으로 제시되지만,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상대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줄이고 무엇보다 자기 안의 질서를 세우는 여성의 자립적 존재 방식, 그리고 “호기심을, 열린 정신을, 자신감을 드러내며 그런 여성을 받아들이거나 심지어 찾기도” 하는 일부 남성에 거는 기대는 현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나의 페미니스트 신념과 사랑에 대한 신비주의적이고 절대주의적인 관점 사이의 내적 갈등”으로 흔들리는 지은이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는 듯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