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하스
하성란 지음. 문학동네 펴냄. 9500원
하성란 지음. 문학동네 펴냄. 9500원
‘과자로 만든 집’은 30년만에 먼지가 되어 무너지고
20년전 사진 한 장을 매개로 ‘날카로운 상처’가 물로 물린다
네번째 소설집의 주제는 시간의 진행과 그에 따른 변화
시·공간 넘나드는 글쓰기 탓 ‘조각퍼즐 맞추기’ 하듯 읽혀
20년전 사진 한 장을 매개로 ‘날카로운 상처’가 물로 물린다
네번째 소설집의 주제는 시간의 진행과 그에 따른 변화
시·공간 넘나드는 글쓰기 탓 ‘조각퍼즐 맞추기’ 하듯 읽혀
하성란(39)씨가 네 번째 소설집 <웨하스>(문학동네)를 펴냈다. 표제작인 <웨하스로 만든 집>을 비롯해 11편의 단편이 묶였다.
1996년 신춘문예 등단작인 <풀>에서부터 마이크로적인 세부 묘사는 하성란 소설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다. 성능 좋은 카메라처럼 대상을 속속들이 포착해서 드러내는 그의 집요한 문체에 독자들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영상의 압도적 위력에 맞설 수 있는 문학 쪽의 대안으로까지 주목받았다. 그러나 작가 자신은 문체에 대한 관심 집중이 마뜩하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문체가 중요하지만, 문체는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이잖아요. 중요한 건 무얼 말하려느냐 하는 거죠. 제 소설에서 문체에만 주목하는 게 뜻밖이고 불만스럽기도 했어요.”
앞선 소설집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새 책에서 작가는 의식적이리 만치 변화를 시도한다. 그 변화의 중심에 ‘시간’이 있다.
<웨하스>에 실린 거의 모든 작품에서 작가는 시간의 진행과 그에 따른 세계의 변모에 날카로운 관심을 표한다. 적어도 이 소설집에서, 시간은 하성란 소설의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효소와도 같다. 시간의 작용에 의해 세상 만물은 발효하고 숙성하며 변화하고 완성된다. 시간은 원인이고 동력이다. 작가 자신은 시간의 그런 속성을 ‘덧없는 아름다움’이라고 말했다. 아름다움은 무릇 견고해야 하고, 덧없는 것이란 아름다움의 차원에 미달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작가는 정확히 그와 반대되는 쪽에 서 있다. 덧없으니까 아름다운 것이고, 아름다움을 이루는 핵심적 요소의 하나가 바로 덧없음이라는 생각이다.(당신은 어느 쪽인가.)
“소설 문체만 주목하는 것 불만”
표제작은 무려 30년의 시차를 널뛰기한다. “삼십여 년 전 시범주택 단지로 조성되었을 때만 해도 이 골목의 주택들은 영화 상연 전에 방영되던 대한뉴스를 탔다.” 아직 동화의 세계에 머물러 있던 주인공 자매들에게는 “눈으로 처음 보는 이층집(이) 동화 속에 나오는 과자로 만든 집 같았다.” 세월은 흘렀고, 결혼해서 집을 떠났던 주인공은 10년 만에 이혼녀의 신분으로 귀향한다. ‘환향녀’까지는 아니지만, 그 여자를 반기는 것은 “풍화되면서 조금씩 먼지가 되고 있는” 집일 뿐. 날림으로 지어졌던 단지 내 주택들은 재개발을 위해 하나둘씩 철거되고, 피차 실패한 결혼의 경력을 안고 돌아온 고향에서 다시 만난 ‘에스(S)’와의 결합 가능성 역시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결국 어머니의 고집으로 매각을 거부하고 있던 집의 2층 바닥이 꺼지면서 주인공이 1층으로 떨어지는 결말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마모력을 상징하는 셈이다. ‘과자로 만든 집’은 자매들을 먹이고 키워 주었지만, 사람이 언제까지나 바삭거리는 과자만 먹고 있을 수는 없는 법.
2004년 이수문학상 수상작인 <강의 백일몽>에서는 20년 전에 찍은 한 장의 사진이 매개가 되어 시간의 화학작용에 관한 사유가 펼쳐진다. 주인공 여자는 사진이 찍힌 20년 전 자동차에 치인 개에게 팔뚝을 물리고, 10년 전에는 핸드백을 노린 날치기의 팔뚝을 물어뜯는다. 20년 전 여자가 포함된 단체사진을 찍었던 ‘와이(Y)’는 여자에게 임신을 시키고는 ‘이제 그만 날 놔줘라. 더이상 물고 늘어지지 말고. 신물이 난다’는 메시지만 남기고 떠나 버린다. “물고 물리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우리가 서로 물고 물리는 것은 아니다. 무는 것은 바로 시간. 우리는 모두 시간의 이빨에 물려 상처 입는 존재들이다. “이십 년 뒤에 Y와 여자가 그렇게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Y도 여자도 까마득히 알지 못한다.” 그들은 개의 턱만 무서워할 줄 알았지, 정작 시간이야말로 날카로운 이빨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강의 백일몽>은 영화 <박하사탕>처럼 지나간 시간과 공간으로 우리를 데려가지만, <박하사탕>에서처럼 논리적이고 선명한 그림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강의 백일몽>에서 재현되는 과거는 후기인상파의 과격한 붓질처럼 흔들리며 중첩되는 상으로 그려진다. 맥락과 줄거리가 불분명한 가운데, 불확실한 파편으로 제시되는 혼란스러운 형태는 관계를 이완시킬 뿐만 아니라 기억과 재현의 능력 역시 떨어뜨리는 시간의 파괴력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은 조금씩 변색된다.”
<그것은 인생>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이 문장은 ‘조금씩 변색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식모에게 납치되어 엉뚱한 인생을 살게 된 서커스의 남자가 주인공. 그는 기억에 남아 있는 몇 컷의 삽화를 근거로 자신의 ‘원래의 생’을 되찾고자 애써 보지만, 소설 속에서 그것은 그다지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납치되는 아이는 <단추>라는 작품에도 나오는데, 생모의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납치되어 낯선 도시에 도착한 이 아이가 잘못 들어선 생의 샛길에서 벗어나 제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하성란표’ 세부묘사는 여전
“왼쪽 다리를 내밀 때 출렁거린 왼쪽 가죽이 오른쪽 발을 내밀 때 출렁거리던 오른쪽 가죽과 서로 부딪치면서 다른 모양으로 물결쳤다.”(<강의 백일몽>)
인용한 문장에서 보듯 마이크로 묘사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보다 더욱 특징적인 것은 하성란씨가 서사를 끌어가는 방식이다. 시간의 단층과 괴리를 추적하는 작가의 문장들은 아무런 사전 설명 없이 수시로 시간과 장소, 정황을 건너뛴다. 소설 한 편을 다 읽어 보아야 비로소 이해되는 문장과 상황이 적지 않다. 앞과 뒤를 꿰어맞춰 가며 읽(어야 하)는 고통 또는 재미가 쑬쑬하다. 그런 점에서 하성란씨의 소설을 읽는 일은 조각난 퍼즐을 맞추는 일과 비슷하다. 작가는 “소설이란 시간의 예술이고, 시간이 초래하는 혼돈과 생략, 비약을 표현하고자 일부러 시·공간을 넘나드는 방식의 글쓰기를 택했다”고 말했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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