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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최성일의찬찬히읽기] 스페인 제국 몰락의 진정한 이유

등록 2007-05-25 19:55

<석류나무 그늘 아래>타리크 알리 지음·정영목 옮김/미래M&B
<석류나무 그늘 아래>타리크 알리 지음·정영목 옮김/미래M&B
최성일의 찬찬히 읽기 /<석류나무 그늘 아래>타리크 알리 지음·정영목 옮김 / 미래M&B

내게 스페인 제국의 몰락 원인은 까다로운 수수께끼였다. 짜 맞추기 어려운 퍼즐이었다. 1588년 영국과 치른 칼레 해전의 참패만으론 그림조각이 턱없이 모자랐다. 이른바 무적함대의 궤멸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뭘까? 드디어 나머지 그림조각을 찾았다. 다분히 결과론적이긴 해도, 비난과 원망과 저주가 뒤섞인 우마르의 예측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모든 이에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늘을 드리워준 나무를 도끼질한 대가는 실로 엄청났다.

“그게 자네 편에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얼마나 오래갈까? 백년? 이백년?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결국 이 땅의 지지러진 문명은 망하고 말 걸세. 유럽 나머지 지역에 추월당할 거야. 그날 그들이 파괴한 것이 이 반도의 미래라는 사실은 물론 자네도 잘 알겠지. 책을 불태우고, 반대자를 고문하고, 이교도를 말뚝에 묶어 불태우는 사람들은 안정된 기초 위에 집을 세울 수가 없네.”

‘불의 벽’ 사건은 1499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알안달루스(이베리아) 반도의 실지를 회복한 기독교 세력은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 대주교의 주도 아래 코란 수천 부가 포함된 수십만 권의 책으로 높다란 벽을 쌓아 불태운다. 가르나타(그라나다)에 있는 이슬람 사원 바브 알람라 인근의 비단시장에서 자행된 분서는 반달리즘의 극치다. 타리크 알리의 이슬람 소설 3부작 가운데 둘째 권인 〈석류나무 그늘 아래〉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첫째 권 〈술탄 살라딘〉에 대해선 〈한겨레〉 2005년 6월17일치에 실린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참조).

소설은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에서 시작해 코르테스로 끝나지만, 소설의 중심은 바누 후다일 가문이다. 서기 932년 함자 빈 후다일은 그의 식구와 그를 따르는 이들과 함께 디마슈크(다마스쿠스)를 떠나 가르나타에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산기슭에 정착한다. 그가 세운 마을은 알후다일로 알려진다. 그의 후손인 우마르 빈 압달라는 2천여 주민의 존경을 받는 알후다일의 영주다. 소설은 우마르의 할아버지 이븐 파리드부터 우마르의 자녀까지 4대에 걸친 가족이야기가 뒤엉킨다.

최성일 / 출판칼럼니스트
최성일 / 출판칼럼니스트
소설에 나오는 귀족 자제의 하녀 후리기, 출생의 비밀, 근친상간 따위가 의외로 그리 칙칙하지 않다. 사랑은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다. 하지만 가난이나 한때의 독특한 성적 취향에는 구애받지 않는다. 사랑 묘사의 우아함은 〈로미오와 줄리엣〉에 꿀릴 게 전혀 없다. 그러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가 〈아라비안 나이트〉 쪽으로 기울게 한다.

타리크 알리는 코르테스의 노란 싹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 짓는다. 코르테스가 누군가? 그는 아스텍 문명을 맘껏 짓밟은 정복자다. 타리크 알리는 그런 그에게 알후다일 절멸작전의 지휘관 역을 맡긴다. 아주 적절한 배역 선정이다. 코르테스는 약관 16살에 불과했으나, 실지회복운동을 통해 잔뼈가 굵은 몸이었다. 그가 그보다 나이가 많았을 부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생존자들의 증오는 우리를 죽이는 독이라고 하지 않더냐?” 최성일 / 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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