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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소설 쓰는 철학자’ 보르헤스, 그 생각의 원형

등록 2008-10-03 21:37수정 2008-10-03 21:38

〈만리장성과 책들〉·〈보르헤스의 지팡이〉
〈만리장성과 책들〉·〈보르헤스의 지팡이〉
〈만리장성과 책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정경원 옮김/열린책들·1만5000원

〈보르헤스의 지팡이〉
양운덕 지음/민음사·2만원

천국이 있다면 그것은 도서관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믿은 사람이 있었다. 한번 읽거나 들은 책을 비상한 기억력으로 두뇌에 담고 마치 엠아르아이(MRI)처럼 입체적으로 현실에 투영하는 데 탁월했던 그의 이름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소설 쓰는 철학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다. 그는 데리다·푸코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바, 철학·종교·문학 등에 대한 사유를 담담히 풀어낸 <만리장성과 책들>에는 쉰셋 중년에 이른 문인의 원숙함이 녹아 있다.

35편의 에세이를 가로지르는 생각의 줄기는 언어와 시간에 대한 문제다. 그 시초에 그는 시황제의 만리장성 축조와 분서갱유를 들었다. 그는 “장서를 불태우는 것과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행위는 비밀리에 서로를 무효화시키는 작용일지도 모른다”고 말함으로써 고독과 영원이 ‘한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고독은 고독한 책 읽기의 고독이며, 영원은 과거-현재-미래의 구분을 거부하고 오직 현재만이 의미 있다는 현재주의(presentismo)의 지속-영원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간을 순환하는 나선으로 이해했던 그의 시간관을 다음 문장은 압축적이고도 인상적으로 보여 준다. “시간은 나를 이루고 있는 본질이다. 시간은 강물이어서 나를 휩쓸어 가지만, 내가 곧 강이다. … 세상은 불행히도 현실이다. 나는 불행히도 보르헤스다.”

이와 같은 시간관의 궤도 끝에 언어-현실의 문제가 있다. 보르헤스의 언어관은 “세계는 사물들이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라고 일갈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았다. 때문에 그는 “언어로 재현해 낼 수 있는 인식 대상은 언어뿐이며 현실이 아니다”라고 믿었다. 이것은 기왕의 사상가들이 내놨던 언어관을 뒤집는 혁명적 발상이었다. 그는 소쉬르가 분석했던 기표-기의의 자의적 결합 논리를 확장시켜, 하나의 기표가 수많은 기의를 생산해 내는 과정에 주목했다. 텍스트에서 기호(언어)로 표현된 하나의 현실이 다양한 현실들로 증폭되는 마술성에 그가 열광했던 것은 차라리 필연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그를 세계문학의 정상에 올려놓은 ‘마술적 사실주의’의 뿌리일 것이다. 이 책을 4년여에 걸쳐 번역한 정경원 교수(한국외대 중남미연구소장)는 이를 일러 보르헤스가 “언어와 인간의 경험 사이의 관계가 극단적으로 경계가 없을 정도까지 문학 세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주문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고 평가한다.

난망한 일일지 모르나 <만리장성과 책들>로 보르헤스 문학의 미로를 견뎌 내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쥐었다고 느낀다면, 철학자 양운덕씨가 쓴 <보르헤스의 지팡이>가 또 하나의 참고자료가 될 만하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보르헤스의 추리소설·실험소설에 담긴 존재론·형이상학을 넘어, 소설에 철학의 메스를 들이대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인식론과 문학론까지 아우르며 독자의 길라잡이를 자청한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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