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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고종석 붓심이 피운 마흔가지 ‘사랑언어’

등록 2009-01-09 19:20수정 2009-01-09 21:52

〈어루만지다〉
〈어루만지다〉
〈어루만지다〉
고종석 지음/마음산책·1만4000원

지난해 신문 연재글 손질해 엮어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속편 격

입술·주름·혀놀림…우리말 탐색
음운 되새김질 의미·감성 꺼내

기자·소설가·언어학자·번역가·정치평론가. 고종석(50)씨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같은자리말들이다.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쓰기로 이름난 그가 새해 들어 스물한 권째 책을 펴냈다. 1993년 장편소설 <기자들>을 내놓은 뒤 16년 만이니, 해마다 한 권 넘게 책을 쓴 셈이다. 문학비평가 권성우씨는 그의 글 알짬으로 “유목민적 자유로움과 강한 자존심”이 빚어낸 “성찰적 유미주의자의 열린 시선”을 들기도 했다. 그의 붓심은 천변만화 유위변전의 언어를 꽃받침 삼아 피어난다. 글마다 차림새는 달라졌어도 그의 글을 하나로 꿰는 코바늘은 사랑이다. 사랑은 그가 서른넷 “푸른 나이”일 적 펴낸 첫 책 첫머리부터 압정처럼 박혀 있다. “사랑에 공포는 없다, 최상의 도덕이므로. 사랑에 의혹은 없다, 최대의 진리이므로. 사랑에 속박은 없다, 참다운 자유이므로.”(우치무라 간조)

<어루만지다>는 지난해 한 신문에 연재한 글을 손질해 엮은 책이다. 지은이는 13년 전 나온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의 속편 격”이라 인정하면서도 체제·내용을 달리했으므로 “자매서이되 온전한 독립서”라고 새겼다. 책은 “입술과 입술을 맞댐으로써 우리는 사랑의 기슭에 발을 들여놓는다”에서 시작해 “(무/잠재)의식 속에 한 점 그늘, 한 점 구김살, 한 점 주름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을 겪지 못하고 생을 지나쳐 온 것이리라”로 맺는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그가 토박이말 마흔 개를 추리고 “그 모국어 낱말들이 서로 수줍게 사랑하고 사납게 질투하며 격렬히 춤추는 모양”을 묘사한 것은 자연스럽다. 그가 뽑은 ‘사랑 사전’의 올림말엔 입술·혀놀림·발가락·손톱·잇바디·주름처럼 몸의 부분을 가리키는 말들이 가장 많다. 그것들 사이에 감추다·궂기다·어루만지다·엿보다·엇갈리다와 같은 동사가 지나고, 바람벽·그네·어둑새벽·술·보름·춤·구슬 등이 앞말들을 두르고 비추는 풍경 노릇을 한다. 그 낱말들이 친족이나 인척처럼 엮인 “텍스트의 안감은 로맨스와 에로스의 경계에 걸쳐 있다.”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가 1861년 그린 <놀란 님프>.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가 1861년 그린 <놀란 님프>.


‘미끈하다’ 편에서 문장 예닐곱을 솎아 보면, 지은이가 사랑의 말을 다루는 실루엣이 드러난다. “미끈함은 점액질의 미끄러움이다 … 미끈함의 점액질 정도가 미끄러움보다 크다는 것은 그 끈끈함이 /ㄴ/ 소리 안에 담겨 있다는 뜻일 테다. /ㄹ/은 그저 흐를 뿐이지만 /ㄴ/은 끈끈하게 흐른다 … 미끈함은 성적 쾌락의 한 질료다 … 거푸거푸 만지고 거듭 문지르면 미끈해지고 매끄러워진다 … 만지는 것은 사랑 행위의 처음이자 끝이다 … 그 미끈함을 일상의 끈끈한 생동으로 껴안을 때, 연애는 (어쩌면) 활명적(活命的)이다.” 음성학·음운론의 관점에서 말을 분석한 뒤 그 결을 찬찬히 되새김질하면서 의미와 감성을 끄집어내는 식이다. 이쯤에서 말이 성길 때 지은이는 문학·음악·영화 등으로 부챗살처럼 생각을 넓혀 빛깔을 입히고 유약을 바른다. <훈민정음>과 <훈몽자회>를 두루 인용하는가 하면, 향가·고려가요에서부터 신경림·황인숙의 시까지 불러낸다. 철학자 질 들뢰즈의 글뿐 아니라 개그맨 김국진도 ‘사랑의 말’로 호명한다. 스스로 밝혔듯 ‘망측한’ 구절도 과감히 노출했다.

논란이 될 대목에서도 지은이는 너나들이하듯 스스럼없다. “몰래 이뤄질 수조차 없을 만큼 성매매의 공간을 말끔히 쓸어냈을 땐, 솟구치는 성욕이 강간 같은 성범죄에서 출구를 찾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꽃값(화대) 없는 청결한 사회보다 꽃값 있는 불순한 사회를 원한다.” 올림말 마흔 개를 모두 토박이말로 삼았다고 했지만 ‘바람벽(--壁)’이 ‘순수한 토박이말’인지는 강물(江-)이 그러하듯 또렷하지 않다. 바늘귀에 실 꿰듯 알뜰하게 다듬은 글에서도 오류가 보인다. 봉우리나 산을 뜻하는 제주 방언 ‘오름(오롬)’을 ‘오롬(오롬)’으로 잘못 적었다.

그러나 잔실수가 있다 하여 지은이 글이 바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바로잡으면 될 일이다. 품질이 좋은 놋쇠를 녹여 부은 다음 다시 두드려 만든 그릇이 방짜라면, 그의 글은 모국어의 물리·사회·생리·심리학을 아우르는 ‘방짜글’이라 할 만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은이를 사랑하는 읽는 이들이 그 티들마저 어루만지리라.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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