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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민중 살리는 지도’에 바친 김정호의 삶

등록 2009-06-14 17:49수정 2009-06-14 20:56

소설가 박범신씨
소설가 박범신씨
박범신 장편소설 ‘고산자’
“잘못된 지도는 백성을 죽인다”
‘지도 독점’ 주장한 국가에 맞서
강한 집념으로 대동여지도 완성
인문·과학적 면모 소설로 복원

박범신(사진)씨의 장편소설 <고산자>(문학동네)는 지도 제작자인 고산자(古山子) 김정호의 생애를 다룬 작품이다.

고산자가 1861년 제작한 대동여지도는 근대 이전 우리 지도 제작 기술의 총화와도 같은 작품이다. 그러나 정작 지도를 만든 고산자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불과 백수십년 전 사람인데도 생몰 연도와 가계, 반상 여부가 두루 불확실한 것이다. 그가 너무 정밀한 지도를 제작했다 하여 나라의 기밀을 누설한 죄로 옥사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속설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대동여지도라는 훌륭한 지도를 만들었음에도 그의 당대에는 그에 걸맞은 평가와 대접을 받지 못했으리라는 추측은 그럴듯해 보인다.

“한 소년이 잘 고른 모래흙이 깔린 아문 앞 공터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열 살배기 고산자, 바로 그였다.”(51쪽)

박범신씨의 소설에서 고산자는 황해도 토산의 병방아전의 아들로 그려진다. 그가 열 살 되던 해 봄 관아 앞 늙은 산벚나무 아래 무릎 꿇고 앉아 있던 장면은 훗날의 지도 제작자를 만든 운명의 한 컷이라 할 만하다.

어린 그가 이른 새벽부터 일종의 농성 태세로 관아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는 데 동원되었던 아비의 행방과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아비는 다른 일행들과 함께 산등성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얼어 죽은 상태로 발견되거니와,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은 관에서 제작한 엉터리 지도였다. 어린 고산자의 뇌리에 ‘지도가 사람들을 죽였다’는 생각이 들어박혔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지도 제작자의 길로 나서게 만든 것이다.


고산자가 만들고자 한 것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리는 지도, 거칠고 부정확한 것이 아닌 정확하고 아름다운 지도, 나라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자유로이 활용하는 지도였다.

“지도는 당연히 나라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편협한 생각 때문에 결국 아버지가 죽은 게 아니던가. 목판본 대동여지도로써, 온 백성이 이를 지녀 더 이상, 아버지 같은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자는 게 그의 오랜 꿈이다.”(84~5쪽)


<고산자>
<고산자>
동양 지도 제작법의 집대성이라 할 대동여지도와 그것을 축약한 대동여지전도, 그리고 우리나라의 자연 및 인문지리를 문장으로 정리한 <대동지지> 등의 제작·간행을 통해 고산자의 그런 꿈은 결실을 거두었다. 게다가 그런 작업이 조정이나 관헌의 도움 없이 오로지 개인의 집념과 노력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은 그의 위대성을 새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이런 독립적인 작업 방식은 지도에 관한 독점적 권리를 주장해온 권력과 필연적으로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압록강과 두만강, 간도 일대를 답사하던 고산자는 청의 군사들에게 체포되어 죽다가 살아나는가 하면, 거꾸로 그 일이 빌미가 되어 이번에는 청나라에 지도를 팔아먹었다며 문초를 당하기에 이른다.

“평생을 바쳐서 얻은 지도의 목판이 마침내 죽어 짊어지고 가는 칠성판이 될 모양이다.”(284쪽)

그의 등에 대동여지전도 목판을 지우고 사사로이 문초를 한 전임 형조참판이 50여년 전 아비를 죽게 만든 토산 현감이었다는 사실은 검질긴 인연의 작용을 말해 준다. 인연설을 좀더 이어 가자면 고산자의 생애는 토산 현감과 얽힌 악연과, 딸 순실이를 낳은 혜련 스님과의 선한 인연 사이에서 흘러갔다고 해도 좋으리라.

소설은 전임 형조참판의 치졸한 복수극과 천주교 박해에 섭슬려 죽을 고비를 넘긴 순실이의 일을 잇따라 겪은 고산자가 대동여지전도 목판과 초벌 지도 등을 집과 함께 태워 버리고, 아마도 지도와 나라가 없는 어딘가로 떠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책을 내고 지난 10일 기자들과 만난 작가는 “고산자는 뛰어난 과학자이자 인문학자였고 수준 높은 목판 예술가였다”면서 “그럼에도 비천한 신분 때문에 역사가 유기해 버린 고산자의 진면목을 소설로써 되살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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