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은. 김진수 기자
1980년 옥중구상…완간까지 30년
4천편에 새긴 방대한 ‘시대의 벽화’
세계문학사 미증유의 기획과 실험
4천편에 새긴 방대한 ‘시대의 벽화’
세계문학사 미증유의 기획과 실험
〈만인보 1~30권(양장 합본 전 11권)〉
고은 지음/창비 펴냄·양장 합본 각 권 2만5000~3만5000원 “저 1980년 여름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 계엄법 교사의 죄명으로 남한산성 밑 육군교도소 특별감방에 갇혀 있는 날들을 지내는 동안 구상한 것에 이 <만인보>가 있다. (…) 살아서 나간다면 몇 가지 일 중 가장 먼저 <만인보>에 매달려 보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다.”(<만인보> 16~20권 ‘시인의 말’) 다행히 시인은 살아서 감방을 나왔고, 그 안에서 스스로에게 한 다짐을 지켰다. 9일 마지막 네 권(제27~30권)이 간행됨으로써 구상에서부터 완간까지 30년 세월이 걸린 <만인보>의 대장정은 막을 내렸다. 잡지 발표를 거쳐 첫 세 권이 나온 1986년부터 따지자면 꼭 사반세기 만의 일이다. 우리 겨레 성원 1만명의 삶을 시에 담겠다는 애초의 계획은 비록 4000명 규모로 줄어들었지만, 그 때문에 <만인보>의 이름과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부러 맞춘 것은 아니겠으되, 서시를 제하고 꼭 4000편이 모여 이룬 <만인보>의 이 방대한 세계를 무어라 일러야 할까. 9일 열린 <만인보> 완간 기념 심포지엄에서는 몇 가지 답이 제출되었다. “<만인보>는 시이면서 역사이다.”(박성현) “하나가 전부요 전부가 곧 하나이다.”(안선재) 그런가 하면 마지막 권에 발문을 쓴 한문학자 임형택 교수(성균관대)는 “시와 소설의 근대적 경계를 의도적으로 월경한 사실”을 <만인보>의 주요한 특징으로 꼽았다. <만인보>가 소설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온 서사(이야기)를 적극 시에 끌어들였다는 뜻이다.
그 말이, <만인보>가 시의 장르 미학을 포기하고 산문성으로 굴러떨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시인 자신은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1~3권 ‘시인의 말’)이라고 <만인보>를 규정했는데, 어디까지나 ‘노래’요 시라는 사실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매편이 존재의 즉시성, 찰나성에 예민하고 민감하게 반응한다”(김형수)는 9일 심포지엄 한 발표자의 언급은 그 점을 가리키고 있음이다. <만인보>는 이야기를 갖춘 시이면서도 시 특유의-선시(禪詩)적 지향을 강하게 보이는 고은 시에서는 더구나 두드러지는-직관과 비약의 요소 역시 놓치지 않는다. [고은 시인 ‘만인보’ 완간] 13~15권에 붙인 ‘시인의 말’에서 고은은 파리의 호적부와 겨루겠다던 발자크를 불러내 “당신의 단명을 내가 보충하겠소”라 호언한다. <만인보>의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발자크나 서구 시인·작가 들의 영향 아래 있다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고은의 출사표를 들어 보라. “나는 이제 서구시의 외세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이 말 한마디에 내 긍지의 전부가 들어 있다.”(1~3권 ‘시인의 말’) <만인보>의 문제성은 그 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 문학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독창적 기획과 미증유의 시적 실험이라는 점에 <만인보>의 위대함이 있다. 4000명의 초상화를 모자이크 조각처럼 이어 붙여 그린 겨레의 초상이자 시대의 벽화. <만인보>를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만인보>는 1940년대에서부터 1980년 5·18까지의 시기를 주된 배경으로 삼아 시인이 직간접적으로 알았던 이들의 삶을 시로 재구성한다. 일관된 줄거리나 방향을 지닌 것은 아니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삶들이 모여서 거대한 그림을 이룬다. 그 안에는 잘 알려진 삶도 있지만 역사의 뒤꼍에 묻힐 뻔한 장삼이사 우수마발의 구지레한 삶 역시 당당히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삶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의 구슬들처럼 서로의 삶을 비춰 준다.
대체로 첫 아홉 권은 1940년대와 그 전후 시인의 고향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며, 10~15권은 1970년대 독재 치하의 삶을 되살린다. 16~20권은 6·25 전쟁의 참상에 집중하며, 21~23권은 1960년 4·19 혁명의 영광과 상처를 돌이켜보고, 24~26권은 신라와 백제, 고려 등 지난 시대의 불교 승려들 이야기에 할애된다. 2007년 11월에 출간된 24~26권 이후 2년 반 정도 숨을 고른 뒤에 나온 마지막 네 권에서 시인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상처라 할 80년 5월 광주로 독자를 끌고 간다. 말하자면 <만인보>의 탄생 지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인보>의 구상에서 완간까지가 하나의 완벽한 순환 구조를 보인다.
“매어놓은 중송아지야/ 너한테 물어보자/ 인간은 어디까지 인간인가/ 인간은 어디까지 인간이 아닌가/ 똥개야 누렁이야/ 너한테 물어보자/ 인간이란 무슨 놈의 짐승이냐/ 광주의 어제도/ 광주의 오늘도/ 광주의 죽음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말살하는 죽음의 시간이었다”(<학살풍경화> 부분)
“놀라운 것은/ 윤상원의 총은/ 단 한발도 쏜 적 없이/ 총탄 장전 그대로/ 방아쇠 당긴 적 없이/ 오는 죽음을 그대로 맞아들였다// 윤상원의 총은 총이 아니라/ 5월의 상징/ 5월 광주의 의미 그것/ 그것은 끝까지 쏴버리지 않은 아름다움이었다 바다 파도였다”(<바다 파도> 부분)
<만인보>의 마지막 권들에는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을 비롯해 정상용, 김종배, 전옥주처럼 잘 알려진 이들은 물론 “시민군 성기철/ 시민군 우준호”(<시민군>)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은 박재영과 그 약혼녀 신영옥, 역시 계엄군에게 살해당한 뒤 영혼결혼을 올리고 망월동 묘지에 나란히 누운 김윤수와 고영자, 그리고 “김밥 광주리 이고 오다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엎어졌”(<대폭발>)던 대명시장 아줌마까지 5·18의 유·무명 주역들이 총출동한다.
<만인보>가 처음 잉태되던 자리로 돌아가 30년 대장정을 마무리한 시인의 소회는 어떠할까. 과거와 미래를, 역사와 전망을 오로지 현재라는 디딤판 위에서 포착하고자 하는 그에게는 시작과 끝이 따로 있지 않다. 무시무종(無始無終). 모든 것이 현재이며, 그런 의미에서 완간된 <만인보>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만인보 30권,/ 끝이라니 이 허허망망한 청사(靑史) 속 그 어느 구석에/ 처음이라는 것 끝이라는 것 함부로 있겠느냐./ 나에게는 신석기시대의 어느 날도 백년 뒤의 어느 날 밤도 현재이다.”(27~30권 ‘시인의 말’)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고은 지음/창비 펴냄·양장 합본 각 권 2만5000~3만5000원 “저 1980년 여름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 계엄법 교사의 죄명으로 남한산성 밑 육군교도소 특별감방에 갇혀 있는 날들을 지내는 동안 구상한 것에 이 <만인보>가 있다. (…) 살아서 나간다면 몇 가지 일 중 가장 먼저 <만인보>에 매달려 보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다.”(<만인보> 16~20권 ‘시인의 말’) 다행히 시인은 살아서 감방을 나왔고, 그 안에서 스스로에게 한 다짐을 지켰다. 9일 마지막 네 권(제27~30권)이 간행됨으로써 구상에서부터 완간까지 30년 세월이 걸린 <만인보>의 대장정은 막을 내렸다. 잡지 발표를 거쳐 첫 세 권이 나온 1986년부터 따지자면 꼭 사반세기 만의 일이다. 우리 겨레 성원 1만명의 삶을 시에 담겠다는 애초의 계획은 비록 4000명 규모로 줄어들었지만, 그 때문에 <만인보>의 이름과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부러 맞춘 것은 아니겠으되, 서시를 제하고 꼭 4000편이 모여 이룬 <만인보>의 이 방대한 세계를 무어라 일러야 할까. 9일 열린 <만인보> 완간 기념 심포지엄에서는 몇 가지 답이 제출되었다. “<만인보>는 시이면서 역사이다.”(박성현) “하나가 전부요 전부가 곧 하나이다.”(안선재) 그런가 하면 마지막 권에 발문을 쓴 한문학자 임형택 교수(성균관대)는 “시와 소설의 근대적 경계를 의도적으로 월경한 사실”을 <만인보>의 주요한 특징으로 꼽았다. <만인보>가 소설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온 서사(이야기)를 적극 시에 끌어들였다는 뜻이다.
만인보
그 말이, <만인보>가 시의 장르 미학을 포기하고 산문성으로 굴러떨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시인 자신은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1~3권 ‘시인의 말’)이라고 <만인보>를 규정했는데, 어디까지나 ‘노래’요 시라는 사실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매편이 존재의 즉시성, 찰나성에 예민하고 민감하게 반응한다”(김형수)는 9일 심포지엄 한 발표자의 언급은 그 점을 가리키고 있음이다. <만인보>는 이야기를 갖춘 시이면서도 시 특유의-선시(禪詩)적 지향을 강하게 보이는 고은 시에서는 더구나 두드러지는-직관과 비약의 요소 역시 놓치지 않는다. [고은 시인 ‘만인보’ 완간] 13~15권에 붙인 ‘시인의 말’에서 고은은 파리의 호적부와 겨루겠다던 발자크를 불러내 “당신의 단명을 내가 보충하겠소”라 호언한다. <만인보>의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발자크나 서구 시인·작가 들의 영향 아래 있다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고은의 출사표를 들어 보라. “나는 이제 서구시의 외세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이 말 한마디에 내 긍지의 전부가 들어 있다.”(1~3권 ‘시인의 말’) <만인보>의 문제성은 그 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 문학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독창적 기획과 미증유의 시적 실험이라는 점에 <만인보>의 위대함이 있다. 4000명의 초상화를 모자이크 조각처럼 이어 붙여 그린 겨레의 초상이자 시대의 벽화. <만인보>를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만인보>는 1940년대에서부터 1980년 5·18까지의 시기를 주된 배경으로 삼아 시인이 직간접적으로 알았던 이들의 삶을 시로 재구성한다. 일관된 줄거리나 방향을 지닌 것은 아니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삶들이 모여서 거대한 그림을 이룬다. 그 안에는 잘 알려진 삶도 있지만 역사의 뒤꼍에 묻힐 뻔한 장삼이사 우수마발의 구지레한 삶 역시 당당히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삶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의 구슬들처럼 서로의 삶을 비춰 준다.
<만인보> 완간을 기념해 시인이 직접 쓴 붓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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