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죄수〉
〈국가의 죄수〉
자오쯔양 지음, 바오푸 정리, 장윤미·이종화 옮김/에버리치홀딩스·2만6500원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탱크 앞을 가로막는 동영상, 그리고 청년들 앞에서 확성기를 들고 연설하는 자오쯔양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빛바랜 사진 한장. 1989년 6월 중국 베이징에서 있었던 ‘그 사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미지다. 그 사건은 중국 한쪽에선 여전히 천안문(톈안먼) 폭동으로 또 한쪽에선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라고 불린다. 지난해 홍콩과 미국 등에서 출간된 자오쯔양의 회고록은 순식간에 매진이 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중국군의 탱크와 총칼이 광장을 휩쓴 1989년 6월4일 이후 2005년 숨질 때까지 가택에서 연금생활을 했던 노 정치가는 2000년 무렵 30개의 테이프에 몰래 육성을 녹음해 미국으로 반출했고, 자신의 비서 바오퉁의 아들 바오푸 등이 이를 글로 옮겼다. 자오쯔양의 회고에 따르면 89년 ‘혼란’의 전환점은 4월26일 <인민일보>에 게재된 사설이다. ‘반드시 기치를 선명하게 하고 동란에 반대해야 한다’는 제목의 이 사설은 4월15일 후야오방 서거를 계기로 추도식에 모여 부패 해결 등을 요구하던 학생과 시민들을 순식간에 반동분자와 체제전복세력으로 낙인찍어 버렸고, 인민들의 분노를 들쑤셨다. 자오쯔양은 북한 방문에서 돌아온 뒤 이 사설을 수정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하지만 몇 번이나 그의 개별 면담 요청을 거부하던 덩샤오핑은 5월17일 상임위원들을 소집해 계엄선포를 결정해 버린다. 3 대 2로 계엄이 결정됐다던 당시 회의가 사실은 어떤 투표도 없었다는 것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상황이 회고록엔 낱낱이 증언돼 있다. 리펑 등으로부터 학생 시위 확산의 책임자로 몰렸던 그는 19일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시위를 벌이고 있던 학생들을 찾아간다. “내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너무 늦게…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아무 상관없어요. 여러분 같은 젊은이들이 큰일이지…여러분들의 요구는 언젠가 받아들여질 겁니다.” 이 연설은 그의 마지막 공개 연설이었다. 반역과 영웅, 극단적으로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지만 정작 자오쯔양은 자신이 공산당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당을 진정으로 위하는 시각이 달랐던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한 듯하다. 1989년 이후 죽의 장막 뒤에 다시 숨었던 중국은 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개혁개방의 속도에 불을 붙여 이제 미국과 함께 G2로 등장했다. 그사이 빈부 및 도농 격차는 끊임없이 벌어졌고, 관료와 상류층의 부패는 극심해졌다. 자오쯔양은 80년대의 회고에서 자신이 덩의 경제노선에 전적으로 찬성했지만 ‘속도’를 강조하는 그의 방향에 우려감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21년 전 자오쯔양이 주장했던 대로 경제개방의 속도조절과 정치개혁이 이뤄졌다면 지금의 중국이 달라졌을까. 누구도 단언할 순 없다. 89년 당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외세의 개입 등에 대해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어찌됐든 간에 군대를 동원해 학생을 진압한 당 총서기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는 그의 울림은 여전히 크다. 광주민주화운동 30년을 맞은 우리에겐 더욱. 그 어느것도 국가의 폭력을 정당화할 순 없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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