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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상처가 두려워 쌓은 철옹성, 안전한가요?

등록 2011-03-04 20:20

<달팽이들> 작가 하재영
<달팽이들> 작가 하재영
단편 여덟편 묶어낸 첫 소설집
불안한 청춘들의 고독 생생히
“등장하는 아이들 모두 나 자신”
<달팽이들> 하재영 지음/창비·1만1000원

2006년 계간 <아시아>를 통해 등단했으며 지난해 장편 <스캔들>을 내놓은 하재영(32)이 첫 소설집 <달팽이>를 펴냈다. 등단작이기도 한 표제작을 비롯해 단편 여덟이 묶였다.

“이곳에 틀어박혀 있는 한 나는 관계에서 생기는 상처나 불쾌로부터 안전하다.”

표제작의 주인공인 웹디자이너는 자신의 5.5평 반지하 원룸 밖으로는 거의 나가려 하지 않는다. 그는 옆방에서 들리는 여자의 신음 소리와 그 얼마 뒤 들리곤 하는 남자의 구두 소리를 근거로 옆방 여자가 불륜 관계에 있는 직장 여성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옆방 여자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탐문하러 온 형사한테서 그 여자가 직장 여성이 아니라 대학생이라는 말을 듣고는 자신의 짐작에 자신이 없어진다.

표제작 <달팽이>의 주인공이 취하는 태도는 그가 보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속 달팽이의 생리에 견주어진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껍데기를 두껍게 만든 대가로 달팽이는 생식 능력을 비롯한 다른 소중한 가치를 포기하거나 양보해야만 한다. 같은 이치로, 상처받기 싫다면서 제 둘레에 철옹성 같은 옹벽을 쌓는 사람은 소통과 이해, 위로와 격려 같은 삶의 보물들 역시 내쳐야만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는 소설집의 다른 인물들 역시 대체로 표제작의 주인공과 다르지 않다.

<고도리>의 주인공은 몇 번의 쓰라린 경험을 거치면서 ‘사랑의 환상’을 믿지 않게 된 인물이다. 환멸에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은 감정을 조롱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에 그는 “자살하지 않을 정도로만 스스로를 파괴하기로 했다.” 요컨대 ‘청춘을 낭비하기 위한 일회적 만남’에 몰두한 것. 낯선 상대와 하룻밤을 보내고는 미련 없이 돌아서는 황폐한 섹스. 그 결과 그는 “서른 살도 되기 전에 할머니가 된 기분”에 사로잡힌다. 뒤늦게 진흙탕에서 빠져나오고자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가 않다. 지금 그는 싸움 끝에 자신의 갈비뼈를 부러뜨린 남자친구와 이별을 앞두고 고도리를 친다. 고도리는 두 사람이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서도 시간을 죽일 수 있는 유용한 방법. 두 개의 가방에 짐을 싸서 현관에 내놓은 남자친구와 주인공은 마지막으로 고도리를 치며 배달된 자장면을 먹는다. “이제 뭐 하지?” 그릇을 내놓은 남자친구의 말에 “글쎄…”라며 주인공이 망설이자, “섹스나… 할까?”라는 남자친구의 제안. 그러나 절실함도 애틋함도 없는 섹스는 고도리 한 판과 다를 바 없는 시간 죽이기일 따름이다. 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 가벼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연작 형식의 제목을 지닌 <타인들의 타인-17세>와 <타인들의 타인-18세>는 하재영 소설 주인공들이 두르고 있는 갑각의 기원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고교 시절을 배경으로 한 두 작품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주인공들이 공통적으로 발레를 배운다는 사실이다. 대학에서 발레를 전공한 작가 자신의 이력을 엿보게 하는 설정이겠거니와, 이보다 더 본질적이고 심각한 것은 그들이 똑같은 욕망의 좌절과 고독에 시달린다는 점이다. <17세>의 주인공은 사춘기가 되었음에도 남들처럼 가슴과 엉덩이가 발달하지 않아 고민하던 중 그 미숙한 체형이 발레리나로서는 최적의 조건이라는 사실 덕분에 ‘구원’을 받는 듯하다. 그러나 같은 발레 학원에 자신보다 더 체형이 좋은 친구가 들어오면서 다시 찬밥 신세가 되고, 그는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온 결핍감, 열등감, 시기심, 자기혐오”를 잊기 위해 폭식에 버릇을 들인다.

역시 발레 특기생인 <18세>의 주인공은 친구를 사귀지 못한 채 점심시간이면 홀로 밥을 먹는 신세다. 그런 그에게 중성적 매력을 지닌 친구 혜준이 다가오면서 구원의 빛이 비추는 듯하지만, 경쟁자가 나타나 혜준의 애정을 빼앗가 가는 바람에 그는 “다시, 타인들의 타인이” 된다. 혼자서 밥 먹는 이들의 식탁 동료가 되어 주는 것이 직업인 인물을 내세운 <같이 밥 먹을래요?>, 그리고 “말로 존재할 뿐 실체가 없는 단어들 (…) 사랑 자유 희망 같은 것들”을 믿지 않는 열쇠수리공을 등장시킨 <싱크로나이즈드>의 세계가 이 두 작품과 같은 맥락이라면, 세 여자친구의 거짓 우정을 신랄하게 까발린 <좋은 친구들>은 같은 이야기를 반대 방향에서 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는 “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나약하고 의존적이고 기만적인, 그래서 자기애와 자기비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아이들은 모두 나다”(‘작가의 말’)라고 썼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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