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
조정권 지음/서정시학·9000원
시의 본령인 서정성을 되찾자!
갈수록 괴팍하고 난삽해져 가는 한국 시의 흐름에 중견 시인들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서정성의 회복을 기치로 내걸고 출범한 출판사 서정시학의 극서정시 시리즈에 참여한 조정권(사진 오른쪽), 이하석(가운데), 최동호(왼쪽)가 그들이다. 최근 시집 <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조정권), <상응>(이하석), <얼음 얼굴>(최동호)을 나란히 내놓은 이들은 지난 15일 기자간담회를 마련해 서정성의 회복을 주창했다.
이 출판사가 기왕에 45권까지 나온 ‘서정시학시인선’ 시리즈와는 구분되게 100번대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한 이 시리즈는 이즈음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는 시의 난해화·번잡화에 맞서 짧고 쉬우면서도 깊이와 아름다움을 아울러 갖춘 시를 표방한다. 계간 <서정시학>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시인 겸 평론가 최동호 교수(고려대 국문과)는 “독자와 소통되지 않는 장황·난삽·기괴한 상상력이 특히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며 “이른바 ‘순수서정시’의 정도(正道)를 되살리자는 게 극서정시 시리즈의 큰 줄기”라고 밝혔다.
이하석 시인도 “서정이란 어느 시대든 시의 기본 바탕”이라며 “내용에서나 형식에서나 과도하게 독자에게 부담을 주는 지금의 한국 시는 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정권 시인 역시 “요즘의 길고 어려운 시들에는 시인인 나부터도 권태감과 피로를 느끼게 된다”며 “지식으로 분석되거나 해석 당하지 않는, 짧고 경제적인 시를 시도해 보았다”고 거들었다.
세 시인의 말마따나 새로 나온 이들의 시집에서는 짧고 함축적인 시들이 여럿 눈에 뜨인다.
“발은 객지(客地)// 죽어라 하고 뛰어내린 곳이/ 삶”(조정권 <머나먼…> 전문)
“새는 사투리를 쓰지 않네,/ 서울 새든 고령 새든.”(이하석 <새 2> 전문)
“별 없는 캄캄한 밤// 유성검처럼 광막한 어둠의 귀를 찢고 가는 부싯돌이다”(최동호 <시> 전문)
특히 인용한 시들만 놓고 보면 이들이 표방하는 극서정시가 일본의 단시 하이쿠를 모범으로 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최동호 교수는 그런 추측을 단호히 거부했다.
“우리 시의 방향은 시조도 하이쿠도 아닌 제삼의 길입니다. 둘 다 언어의 경제학이 장점이지만 시조는 도락적 측면이 승한 반면 정신적 깊이가 모자라고, 하이쿠는 시조가 지닌 장점이 없어서 소통 불능의 암호로 바뀐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극도로 축약된 것 속에서 여백과 행간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극서정시가 디지털 시대에도 맞다고 생각해요.”
최 교수는 “미술사 쪽의 미니멀리즘 운동과 비슷하게 축소와 내포, 단순화를 통한 의미의 명징화가 극서정시의 궁극이라 할 수 있다”며 “소월의 <산유화>, 지용의 <구성동>, 미당의 <동천>, 지훈의 <고사>(古寺), 김수영의 <풀> 같은 작품들이 우리가 표방하는 짧고 간결한 극서정시의 선례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 황동규 시인이 실천하고 있는 ‘극(劇)서정시’가 극적인 효과를 위해 길이가 길어지는 경향이 있는 반면, 자신들이 표방하는 극(極)서정시는 어디까지나 짧고 간결한 형식을 추구한다고 설명했다.
서정시학의 극서정시 시리즈는 김종길·오세영·유안진 등 원로 시인들의 시집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극서정시 운동을 시단의 세대간 갈등으로 볼 가능성과 관련해 최 교수는 “젊은 시인들 중에서도 짧은 서정시의 정도를 지키는 이들에게는 문호를 열어 놓고 있다”며 “기본은 어디까지나 시의 소통이지 세대간 갈등이나 대립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조정권 시인도 “누구나 짧게 써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며 “다만 그간 시의 언어가 과소비 형태로 치달아 온 데 대한 반대급부로서 언어의 경제학 내지는 위생론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정권 시인의 말마따나 “중요한 것은 시의 수준으로써 주장을 담보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나온 세 시집의 성격과 완성도는 아쉬움을 주는 게 사실이다. “밤새도록 지붕위로 걸어 다니는 눈송이/ 소리 내지 않는 눈부처”(조정권 <청빙가>(聽氷歌) 4) “꽃길을 밟고 지나온 바짓가랑이 묻힌 향 따라오는 흰 나비”(<청빙가> 16)처럼 극서정시의 정의에 어울리는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작품들도 적잖이 눈에 뜨인다. 한국 시의 흐름을 바꾸고자 하는 중견 시인들의 움직임에 대한 문단의 반응이 주목된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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