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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가난을 이유로 자살하면 죽음마저 유죄

등록 2011-05-27 22:00수정 2015-11-03 00:43

〈밑바닥 사람들〉
〈밑바닥 사람들〉
정혜윤의 새벽 세시 책읽기 /

〈밑바닥 사람들〉
잭 런던 지음·정주연 옮김/궁리·1만1800원

우리에겐 <강철 군화>나 <야성이 부르는 소리>로 잘 알려진 작가 잭 런던은 1902년 탐험가가 된 심정으로 런던의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1902년 영국은 호황기였는데도 5분만 걸으면 누구나 런던의 슬럼가에 갈 수 있었다. 잭 런던이 빈민굴에 들어가 보겠다고 하자 토머스 쿡 여행사의 직원은 손님께서 살해당하시면 사체의 신원을 확인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빈민가의 굶주림은 끔찍했다. 당시 런던은 ‘부자들의 낙원, 현자들의 연옥, 빈자들의 지옥’이었다. 노동계의 소용돌이에서 튕겨나올 수밖에 없는 가장들은 술통에 처박히고, 노인에겐 다시 시작할 기회가 없었고, 발육부진 아이들에겐 꽃필 기회가 없었다. 노숙자들은 거리에서 죽어갔다.

잭 런던은 칼라일의 이런 글을 인용했다. “사람이 불쌍한 것은 죽기 때문이 아니다. 심지어 굶어 죽기 때문도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이미 죽었고 모든 사람이 죽는다. 이유도 모르고 비참하게 살기 때문에 불쌍한 것이다. 고되게 일하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지친 채 전세계적 자유방임 속에서 외따로 떨어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기 때문이다.”

잭 런던은 이때의 경험을 <밑바닥 사람들>이란 책으로 엮었다. 그중 ‘자살’에 관한 글이 있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자살을 하면 일시적인 정신 이상 행동이란 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노동 계급 자살의 주원인은 고통과 가난과 도저히 벗어날 길 없는 비참한 생활 때문이다. 그래서 잭 런던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판결은 진실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법이 거짓말이며 법을 통해 인간은 치욕스러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일시적 정신 이상이라니! 거짓말로 뱃속에 고기를 채우고 멀쩡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뱃속이 텅 빈, 멀쩡한 옷 한 벌 없이 헐벗은 형제와 자매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사회적 불행과 고통은 누구라도 제정신을 잃게 만들 수 있다. 프랭크 캐빌라라는 남자가 법정에 섰다. 당시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그는 잘생긴 남자다. 검고 표정이 풍부한 눈, 품위 있고 윤곽이 또렷한 코와 턱.” 그는 어떤 일을 저질렀을까? 그는 원래 일 잘하고 착실하고 온화하고 자애로운 남편이었다. 그의 아내는 크고 쾌활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아이들은 단정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일자리를 잃었다. 자기 잘못 때문은 아니다. 그는 18개월 동안 안정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가 힘껏 온갖 임시직을 전전했어도 아내와 네 아이들이 눈앞에서 굶고 있었다. 11월 아침 일찍 그는 주머니칼을 꺼내 아내의 목을 베고 열두 살 난 아이의 목도 베고 여덟 살 아들의 목, 네 살 딸의 목도 벴다. 16개월 막내의 목도 벴다. 그리고 저녁에 경찰이 올 때까지 그는 하루 종일 시체 옆에 앉아 가족들을 지켜보았다. 경찰들이 오자 그는 불을 켜려면 가스계량기 입구에 일 펜스를 넣어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법정에 섰을 때 그는 많이 낡은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칼라가 없었다. 신문은 그가 잘생긴 남자였다고 보도했다.

이 글을 읽으며 우리 사회의 노동 계급과 실직한 가족의 자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2년 런던의 자살한 가난한 사람들이 정신 이상 때문이란 판결을 받았다면 우리 시대 사람들은 의지박약과 처지를 모르는 과분한 욕심 때문이란 판결을 받고 있다. 그때와 똑같이 뱃속이 시커멓고 멀쩡한 옷을 입은 사람들로부터 같은 거짓말을 듣고 있다.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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