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 수 있겠니 김인숙 지음/한겨레출판·1만2000원
넉달간 발리서 머물며 쓴 소설
치정 살인사건·지진 등 소재로
한국여성과 현지남성 사랑 그려
치정 살인사건·지진 등 소재로
한국여성과 현지남성 사랑 그려
미칠 수 있겠니
김인숙 지음/한겨레출판·1만2000원
김인숙의 새 소설 <미칠 수 있겠니>는 이방의 ‘섬’을 무대로 삼는다. 소설 속에서 명시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지만, 그 섬은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인도네시아 발리. 작가는 2006년께 처음 가 본 발리에 매료되어 그 뒤 몇 차례 더 그곳으로 길고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결국 지난해 넉 달 동안 발리에 머무르며 이 소설을 썼다.
작가들치고 여행 싫어하는 이는 드물지만, 그중에서도 김인숙은 유난히 해외 걸음이 잦은 편이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차곡차곡 작품으로 쌓였다. 1990년대 초의 오스트레일리아 체류는 경장편 <먼 길>로 이어졌고, 2000년대 중반의 중국 체류는 장편 <소현>과 산문집 <제국의 뒷길을 걷다>를 낳았다. 처음부터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여행지를 택했다기보다는 여행지에서의 체험과 사유가 자연스럽게 소설로 우러나온 것이었다.
<미칠 수 있겠니>의 여주인공 ‘진’은 7년 만에 섬을 다시 찾는다. “일 년 내내 한여름의 햇살이 폭죽같이 터지”며 “꽃들은 사철 내내 온몸으로 색깔을 토해”내는 섬에는 그가 같은 이름의 연인 진(주변 사람들은 둘을 구분하기 위해 남자 진을, 성까지 붙여 ‘유진’이라 부른다)과 함께 살던 ‘진의 집’이 있다.
“진은 그를 진이라고 불렀고 그 역시 그녀를 진이라고 불렀다. 진과 진이 서로의 눈앞에서 가만히 웃었다. 그럴 때마다 그가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와 그녀와 함께 흔들렸다. 몸속에서 또 하나의 웃음이, 또 하나의 호흡이, 또 하나의 통증과 갈망이 같이 출렁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자신과 같은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의 몸속에서 함께 흔들리던 시절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진의 집’에서 7년 전 어느 날 끔찍한 살인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진이 한국에 있는 동안 섬에서 가구 디자이너로 일하던 유진은 자신의 집 하녀인 어린 원주민 여자애를 임신시켰고, 그 아이가 유진의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본 진은 맹렬한 살의에 사로잡힌다.
칼이 휘둘러지고 피가 뿜어져 나오는 ‘활극’ 속에서 원주민 여자아이는 결국 숨을 거두는데, 정작 그 아이를 죽인 살인범으로 체포된 것은 여자아이의 연인이었던 남자아이였다. 남자아이가 질투와 분노에 눈이 멀어 여자아이를 살해했다고 섬 사람들은 이해했다. 작가는 여자아이를 죽인 범인이 실제로 남자아이인지 아니면 진 자신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음으로써 독자의 궁금증을 자극한다. 그리고 살인사건의 진범은 길고 먼 우회를 거친 다음, 소설 말미에 가서야 확실해진다.
그 우회의 과정은 진이 원주민 택시운전사 이야나를 만나고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 가며 크고 작은 시련을 함께 겪으면서 서서히 연인이 되어 가는 과정과 포개진다. 실종된 유진의 행방을 쫓아 섬을 다시 찾은 진은 이야나의 단골이 되면서 그와 차츰 가까워진다. 두 사람이 비슷한 실연의 상처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 이들을 서로에게 끌어당긴다. 이야나 역시 소꿉동무 출신 연인 수니가 가난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 가 버리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처지. 여기에다가 돈 많은 외국 노부인의 양자가 되어 유산을 상속받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야나의 친구 만의 이야기가 곁들여지면서 소설은 원주민들의 일상과 욕망 속으로도 파고든다.
소설에서 큰 전환점이 되는 것은 섬을 뒤흔들고 이제까지의 일상을 무너뜨린 지진이다.
“사람들이 모두 고꾸라지듯 땅에 납작 엎드렸다. 도망칠 데도 숨을 데도 없었다. 그들은 엎드려 비명을 삼켜가며 땅과 함께 흔들렸다.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비명 소리가 높아졌다가 울부짖음으로 변했다. 닭들이 무섭게 울어댔다. 땅바닥에 뺨을 붙인 채로 이야나는 사원의 석상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비일상(非日常)과 죽음을 배경으로 할 때 일상과 삶의 소중함은 한층 선명해지는 법이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과 실종, 튼튼하게만 보였던 일상의 붕괴는 두 주인공으로 하여금 삶을 더욱 악착같이 움켜쥐게 만든다. 이야나의 말을 들어 보라.
“지금, 이렇게 살고 있잖아요. 무슨 짓을 해서든, 움켜쥘 것이 여자의 손밖에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라도, 이 어둠과 물속을 벗어나고 싶은 거잖아요. 살고 싶은 거잖아요, 나… 미치게, 미치게 살고 싶은 거잖아요….”
작가는 “이 소설은 제목이 먼저 떠오르고 이야기가 뒤따른 경우”라면서 “두 주인공이 그 모든 상황을 겪고 나서도, 어쩌면 겪었기 때문에 계속 연결된다는, 나름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그 우회의 과정은 진이 원주민 택시운전사 이야나를 만나고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 가며 크고 작은 시련을 함께 겪으면서 서서히 연인이 되어 가는 과정과 포개진다. 실종된 유진의 행방을 쫓아 섬을 다시 찾은 진은 이야나의 단골이 되면서 그와 차츰 가까워진다. 두 사람이 비슷한 실연의 상처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 이들을 서로에게 끌어당긴다. 이야나 역시 소꿉동무 출신 연인 수니가 가난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 가 버리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처지. 여기에다가 돈 많은 외국 노부인의 양자가 되어 유산을 상속받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야나의 친구 만의 이야기가 곁들여지면서 소설은 원주민들의 일상과 욕망 속으로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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