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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스텔스 수첩’에 숨긴 노동자의 또다른 365일

등록 2011-11-18 20:56수정 2015-11-03 00:44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
정혜윤의 새벽 세시 책읽기 /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
후지와라 신야 지음·강병혁 옮김/푸른숲·1만3000원

후지와라 신야의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에는 엔(N)이란 남자가 나온다. 석유 회사 직원인 엔은 어느 날 보통 때보다 집에서 일찍 나와 첫 전철을 타고 시부야 거리로 갔다. 전철역 근처에서 그는 어떤 냄새를 맡았다. 이상한 말일지 모르지만 몹시 그리운 냄새였다. 엔은 어려서 신문 배달을 하며 어렵게 공부를 했다. 배달을 마치면 학교 가기 전 공원 그네에 앉아 빵과 우유를 먹었다. 그 짧은 시간이 엔이 유일하게 홀로 여유를 갖고 생각이란 것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후 엔은 취업에 성공했다. 그렇지만 매일매일 눈을 부릅뜨고 석유 가격 동향을 살펴보다 보면 거액의 머니게임을 하는 놈들에게 농락당하는 기분이 들었고 일상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관리당하는 느낌이 들곤 했다. 바쁘다 보니 가족들과도 멀어진 듯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으나 그렇다고 딱히 도망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엔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붕붕 뜬 채로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시부야 거리에서 엔은 오래전 공원 그네에 앉아 빵과 우유을 먹을 때의 그 짧은 사색의 시간에 맡았던 그 냄새를 다시 맡은 것이었다. 그 뒤로 그는 집에는 핑계를 대고 매일 아침 첫 전철을 타고 시부야 거리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면 그때만큼은 자유로운 부랑자가 된 기분이 들었고 도시의 흐름도 다르게 느꼈다. 그는 자기만의 수첩을 만들기 시작했다. 엔은 그것을 스텔스 수첩이라고 불렀다. 스텔스는 적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기 위해 자신을 감추는 기능을 한다. 수첩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같은 주의 같은 요일이 짝을 이루고 있다. 그는 업무용 페이지와 자신의 페이지를 나눠놓은 것이다. 그래서 일 년 치 한권에 730일분의 공간이 있다. 그는 하루 중에 아무에게도 팔아넘기지 않는 자신만의 시간을 시부야에서 찾아낸 것처럼 수첩 속에도 자신이 머물 자신만의 장소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제, 토요일 일요일 짧은 여행 혹은 퇴근 후의 시간은 내일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휴식의 시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잘 먹고 푹 자둬야 하는 시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어떤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먹고사는 것을 해결해야 하는 시간, 비참함과 모욕을 참아야 하는 순간, 굽실거리는 순간, 멍하니 기계적으로 흘려보내는 순간도 있지만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의 갈망 때문에 밤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녘에 깨어 있는 순간도 있다. 그 갈망은 하나의 상품으로 여겨지지 않고 싶다는 것, 명령에 따라 꾸역꾸역 살고 싶지 않다는 것,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 나도 꿈꾸는 인간이란 것, 자기 손으로 기쁨을 창조해 보고 싶다는 것, 작은 기쁨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것, 어떻게 해서든 인간적으로 좀더 훌륭해지고 행복해지고 싶단 것 같은 속마음을 포함한다.

노동에서 소외될수록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은 더욱더 간절하다. 어느 외국인 노동자가 고된 노동 후 휴식시간에 벽에 기대어 기타를 치며 웃을 때 그 미소 안에는 인간적 구원의 가능성이 담겨 있다. 어느 직장인이 일요일마다 산에 오를 때 그가 호흡하는 공기 안에는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고 순수한 것과 마주 서고 싶다는 인간적 동경이 아른거린다. 인간은 대체로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살지만 또 그렇게 살고 있는 것만도 아니다. 어떻게든 삶 속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이미 마음속에 자신만의 스텔스 수첩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365일을 730일로 사는 능력을 가졌다. <시비에스>(CBS)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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