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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크리스마스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등록 2011-12-16 21:00수정 2015-11-03 00:44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파리의 우울
샤를 보들레르 지음·윤영애 옮김/민음사·9000원

내겐 크리스마스만 되면 꼭 생각나는 책이 몇 권 있고 각각의 책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그중 한 권의 사연은 이렇다. 한 남자가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앞서 다른 이야기를 한 편 들어야 한다고 했다. 다음이 그 이야기다.

한 남자가 사랑에 빠졌다. 아주 아름다운 눈을 가진 여자랑. 그 둘은 하루 종일 붙어 있었는데 그 하루가 짧게만 느껴졌다. 둘은 서로의 생각이 일치했기에 앞으로 둘의 영혼도 하나가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그들은 아직 완전히 단장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벌써부터 호화로움을 자랑스럽게 과시하는 카페에 앉았다. 눈부신 하얀 벽, 반짝거리는 거울, 머리 위에 과일이나 고기파이를 이고 있는 요정과 여신들의 조각상, 오색 과자가 들어 있는 투명한 오벨리스크. 그런데 그 연인들이 앉은 자리 바로 앞 보도에 마흔 살쯤 되는 선량해 보이는 한 남자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 남자의 피곤한 얼굴에는 희끗희끗 수염이 나 있었다. 그 남자는 한 손으로 작은 사내아이를 붙잡고 있었고 다른 한 팔로는 아직 걷지도 못하는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들은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다. 그 여섯 개의 눈은 나이에 따라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똑같이 감탄한 표정으로 새 카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은 카페를 바라보며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까!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까! 모든 가난한 자들의 돈을 모조리 저 벽에 발라놓은 것 같구나”라고 말하고 있었고 어린 소년의 눈은 “어쩌면 저렇게 아름답지! 어쩌면 저렇게 아름답지! 그렇지만 이 집에는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제일 어린 꼬마는 그저 호화로운 카페 인테리어에 매혹당한 나머지 어리둥절 한없는 즐거움만을 느끼고 있었다. 무심코 사내아이를 지켜보던 남자는 그 눈들 앞에 연민을 느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목마름을 채우고도 남을 커다란 유리잔을 들고 있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연인의 눈에서 자신의 생각-연민과 부끄러움과 슬픔-을 읽고 싶어했다. 다행히도 그녀의 눈 역시 더할 나위 없이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슬픔을 느끼는 와중에도 그녀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눈에 빠져들며 위안을 받았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저 인간들이 견딜 수 없군요. 카페의 주인에게 부탁하여 저들을 여기서 멀리 쫓아낼 수 없을까요?”

여기까지는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 나오는 이야기다. 내게 이야기를 들려준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에 앞서 보들레르의 이야기를 들려준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보들레르와 똑같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넘치는 크리스마스 밤에 그는 자신의 어여쁜 천사를 잃어버렸다.

정혜윤 CBS 피디
정혜윤 CBS 피디
크리스마스 밤에 더욱 볼품없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창문들이 있다. 한 번도 크리스마스 트리에 앙증맞게 매달려 있는 꼬마전구의 깜빡이는 빛을 반사해본 적 없는 창문들은 다른 이야기들을 숨기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아마도 외로움과 노쇠와 결핍, 빈곤에 관한 것일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서로의 눈빛 속에서 무심코, 하지만 결사적으로 자신과 같은 영혼을 찾으려 한다. 그것을 찾지 못했을 때 사랑은 깨진다. 가난한 사람들도 자신의 처지보다 나은 사람들의 눈 속에서 뭔가를 찾고 있다. 도저히 그것을 찾아내지 못했을 때 절망이 피어난다. 하지만 경이로운 일은 다른 세계의 창문들 너머의 눈동자들이 마주칠 때, 그 눈동자들이 서로를 외면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CBS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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