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우리였던 그림자>(2012, 엄지영 옮김, 열린책들)
세풀베다 소설 ‘우리였던 그림자’
피노체트때 혁명가 넷
30여년 만에 다시 해후
비자금 카페 털기 나서
칠레사회 희망 되물어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라는 영화가 있다. 1973년 아옌데 대통령의 민주적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다룬 영화다. 당시 쿠데타 세력의 암호가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였다. 2000년대의 칠레 수도 산티아고를 배경 삼은 루이스 세풀베다(63·사진)의 소설 <우리였던 그림자>(2012, 엄지영 옮김, 열린책들)에도 시종 비가 내린다.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내리는 그 빗속에서 왕년의 좌익 혁명 투사 네 사람이 삼십여년 만에 해후한다. “살도 많이 찌고 머리도 많이 벗겨진데다 또 수염도 하얗게 세어 버”린 그들이 한데 모인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의 청춘은 취조실에서 전기 봉으로 두드려 맞으면서 갈가리 찢겼고, 수년 동안 갇혀 있던 감옥 안에, 여전히 낯선 나라의 낯선 방 안에,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기이한 운명 속에, 또 이제야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구덩이 속에 묻힌 채,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네 사람은 독재 정권의 폭압에 꽃 같은 청춘을 빼앗긴 이들. 고문을 받다 죽거나 비밀경찰의 총에 맞은 채 흙구덩이 속에 묻힌 동지들에 비해서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지만 도피와 망명, 환멸과 분노 속에 그들의 청춘은 속절없이 사위어 갔다. 그런 그들이 한 세대가 훌쩍 넘는 세월의 강을 건너뛰어 한자리에 모인 까닭은 잃어버린 청춘의 그림자를 되찾으려는 것.
그들의 ‘그림자 찾기’를 추동한 것은 아예 별명부터가 ‘그림자’였던 전설적인 혁명 투사 페드로 놀라스코였다. 아나키스트인 페드로는 퇴역 군인들의 비자금이 카페 벽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그 돈을 털 것을 제의한다. 그렇지만 정작 페드로 자신은 거사일에 맞추어 자유 의지에 따른 자살을 감행하기로 한다. 일이 꼬이느라 페드로는 자살하러 가던 길에 이층 건물에서 날아온 전축에 머리를 맞아 어이없이 죽고, 그런 사고에도 아랑곳없이 네 사람은 그가 일러준 카페에 침입해 비자금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한다.
살해당한 이들의 주택, 고문을 면하게 해준 대가로 받은 금품, 해외로 망명할 수 있도록 출국 허가증을 끊어 주고서 넘겨받은 차량, 그리고 협박 또는 공모로 받은 뇌물 등으로 마련한 비자금을 되찾아온 것이 작은 승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것으로 이들의 그림자 찾기가 완성되는 것은 아닐 테다. 작가는 독재자 피노체트가 물러난 뒤에도 여전한 감시와 통제, 그리고 갈수록 심각해지는 빈부격차의 현실을 우울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서울 강남에 해당하는 산티아고 동쪽에 “풍요로운 승리자들의 나라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반면, 이 도시의 나머지 구역은 전혀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산티아고의 남쪽과 북쪽, 서쪽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 어른들은 언제 직장에서 잘릴지 모르는 불안과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는 반면, 삶의 희망을 찾지 못해 어릴 때부터 마약에 찌든 청소년들은 정신 연령이 유치원생 정도에 불과한 사이코패스로 전락한다. 더군다나 이 아이들은 흉악한 범죄도 마다 않아 어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곤 한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 것인가. 작가가 은퇴를 앞둔 남자 형사 크레스포와 젊은 여형사 아델라 보바디야에게서 미약하나마 희망의 씨앗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아델라는 경찰학교 학생 시절 고문 피해자를 만나 용서를 구한 바 있다. 그가 존경하는 상사 크레스포는 비자금이 털린 카페를 봉쇄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언론사들에 연락해 기자들을 부른 뒤 비자금과 함께 있었던 회계 장부 내역을 직접 큰 소리로 읽는다. 그 순간 산티아고에 퍼붓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친다.
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30여년 만에 다시 해후
비자금 카페 털기 나서
칠레사회 희망 되물어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라는 영화가 있다. 1973년 아옌데 대통령의 민주적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다룬 영화다. 당시 쿠데타 세력의 암호가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였다. 2000년대의 칠레 수도 산티아고를 배경 삼은 루이스 세풀베다(63·사진)의 소설 <우리였던 그림자>(2012, 엄지영 옮김, 열린책들)에도 시종 비가 내린다.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내리는 그 빗속에서 왕년의 좌익 혁명 투사 네 사람이 삼십여년 만에 해후한다. “살도 많이 찌고 머리도 많이 벗겨진데다 또 수염도 하얗게 세어 버”린 그들이 한데 모인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의 청춘은 취조실에서 전기 봉으로 두드려 맞으면서 갈가리 찢겼고, 수년 동안 갇혀 있던 감옥 안에, 여전히 낯선 나라의 낯선 방 안에,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기이한 운명 속에, 또 이제야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구덩이 속에 묻힌 채,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루이스 세풀베다(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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