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 다해도 채무자 멍에뿐인
희망잃은 세대의 절박함 응시
홍수처럼 밀려든 재개발 사회
고통받는 사람들 아픔 보듬어
“이젠 모든게 결과여서 초조해”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새로 나온 김애란(32·사진)의 세번째 소설집 <비행운>(문학과지성사)에 수록된 단편 <서른>의 주인공은 서른이라는 삶의 굽이가 지니는 의미를 이렇게 요약한다. 이 말은 어쩌면 작가로서 김애란 자신이 느끼는 세대적 감각을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10년 전인 2002년 제1회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으며 샛별처럼 등장한 뒤 소설집 두 권과 장편 하나를 내는 동안 김애란도 어느덧 서른 고개를 넘게 되었다. 더는 이십대의 미숙함과 순수함으로 양해를 받을 수 없는 나이가 된 것이다.
<비행운>에는 두번째 소설집 <침이 고인다>(2007) 이후 발표한 단편 여덟이 실렸다. 이 가운데 <서른>은 다단계 판매에 휩쓸린 서른 살 여성의 고백 형식을 띤 소설이다. 주인공은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아온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가 무언가 되었다면 그 이름은 채무자. “예나 지금이나 빚을 진 사람이라는 건 똑같은데. 좀더 나쁜 채무자가 되었다고 하는 게 맞을까요.” 치열한 노력과 맹랑한 결과 사이의 이해할 수 없는 괴리에 절망한 그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학원을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생각한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자신과 자신의 세대는 물론 이대로는 다음 세대까지도 희망이 없다는 그의 절박한 ‘진단’에 이 사회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벌레들>과 <물속 골리앗>은 압도적인 재난의 상상력으로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다. <벌레들>에서 재개발지구 옆 연립주택으로 이사 온 신혼부부는 정체 모를 벌레들의 침입으로 고통을 겪는다. 특히 임신한 여자에게 벌레와의 싸움은 태아와 가정을 지키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벌레와 실랑이를 벌이던 중 결혼반지를 창밖으로 떨어뜨린 그가 반지를 찾으러 어둠 속 재개발지구의 폐허로 들어갔다가 양수가 터지는 바람에 거기서 혼자 출산을 해야 하는 결말은 그 싸움이 성공하지 못했음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물속 골리앗>은 재개발지구 아파트에 홀로 남은 모자가 홍수에 갇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병을 앓던 어머니마저 숨을 거두자 소년은 화장실 문짝 등으로 뗏목을 만들어 탈출하기로 한다. 뗏목 위에 어미의 주검을 싣고 며칠을 가 보아도 사람의 그림자라곤 보이지 않는다. 곡절 끝에 어미의 주검마저 물에 떠내려 보낸 뒤 소년은 가까스로 타워크레인에 기어올라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주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벌레들>에 이어 여기서도 재개발이 재난과 직간접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세상 전체가 물에 잠긴 가운데 보이는 것이라곤 대형 크레인뿐이라는 주인공 소년의 관찰은 개발과 재난 사이의 함수관계를 함축적으로 말해준다. 한쪽 팔이 긴 크레인이 “한쪽 편만 드는 십자가처럼 보였다”거나, 체불 임금을 요구하며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벌이다가 의문의 실족사를 당한 아버지의 이야기는 크레인 농성으로 상징되는 소설 밖 현실을 효과적으로 환기시킨다.
“마치 지구상에 살아남은 유일한 생물처럼 가지를 뻗고 물안개 사이로 음산하게 서 있었다”(<물속 골리앗>)는 문장에서 보듯 크레인이 나무의 이미지를 찬탈한 대신, 정작 원래의 나무는 뿌리가 뽑힌 채 물길에 휩쓸려 내려간다. <벌레들>에서도 “바람에 따라 신성하고 아름답게 흔들렸”던 나무는 굴착기가 휘두른 앞발에 “전쟁 중 길가에 함부로 버려진 시신처럼 쓰러져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서른을 넘어선 작가 김애란의 문제의식이 단지 세대론과 계급론적 맥락에 머물지 않고 한층 근본적인 생태적 차원으로까지 뻗어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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