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반딧불의 잔존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지음, 김홍기 옮김/길·2만원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네.” 이 낯설지 않은 탄식으로 시작하는 책은 단테의 <신곡> 가운데 ‘지옥편’이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저 하늘엔 별이 떠 있는데 그 별은 그냥 무심히 총총거리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길을 올바로 걷도록 이끄는” 존재로 내 머리 위에 있다. 어두운 숲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 단테는 두려움에 떨다가 길잡이를 자처하는 베르길리우스를 만난다.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을 보낸 사람이 다름 아닌 단테의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라고 알려준다. 사랑하는 연인이 구원을 위해 자신을 보냈으니 마치 “추운 밤에 고개를 숙이고 오므라든 꽃들이 아침 햇살에 모두들 줄기에서 활짝 피어나듯이” 그렇게 힘을 내라고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에게 말한다. 힘을 낸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나서 지옥문 앞에 도착한다. 지옥문 앞에는 이런 구절이 써 있다. “나를 거쳐서 길은 황량의 도시로/ 나를 거쳐서 길은 영원한 슬픔으로/ 나를 거쳐서 길은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나’는 물론 지옥이다. 지옥이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는 것이다. 지옥이란 어떤 곳인가? 바로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이다. 지옥이 자신을 일인칭 ‘나’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자꾸자꾸 읽다 보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나’가 정말 ‘나’라는 ‘인간’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나라는 인간을 통과하는 사람은 영원한 슬픔으로, 나라는 인간을 통과하는 사람은 모든 희망을 버리게 되는 것으로. 그러니까 지옥을 어디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누군가의 작은 지옥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단테에게 지옥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 빛이라고는 없는 암흑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암흑과 눈부신 빛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은 1941년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어두운 시절에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단테의 ‘지옥’을 읽는 파솔리니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파솔리니는 ‘지옥’ 26곡에 나오는 반딧불에 빠져든다. 26곡에 나오는 반딧불은 원래는 지옥에 빠진 정치인들이 뿜어대는 빛이었다. 파솔리니가 반딧불에 빠져든 것은 지옥 같은 세상이 어둡기는커녕 서치라이트와 번쩍이는 조명 덕분에 대낮같이 환했고 반딧불은 죄인들의 빛이 아니라 이런 세상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나오는 미약하지만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빛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파솔리니는 반딧불에게서 사랑과 우애의 몸짓을 발견했고 단테의 지옥은 바뀌었다. 지옥은 대낮처럼 눈부시게 환하고 희망은 반딧불처럼 희미하다. 반딧불이는 오로지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만 빛을 발한다. 그러나 그 빛은 너무나 미약하고 금방 사라지고 또 사라지고 스포트라이트, 서치라이트의 사나운 빛을 피해 다녀야만 한다. 하지만 그 빛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어디선가 출현하는 빛이기도 하다. 이 눈부시게 번쩍거리는 지옥 같은 세상에 희망이 아직도 있다는 작은 증거처럼.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지음, 김홍기 옮김/길·2만원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네.” 이 낯설지 않은 탄식으로 시작하는 책은 단테의 <신곡> 가운데 ‘지옥편’이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저 하늘엔 별이 떠 있는데 그 별은 그냥 무심히 총총거리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길을 올바로 걷도록 이끄는” 존재로 내 머리 위에 있다. 어두운 숲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 단테는 두려움에 떨다가 길잡이를 자처하는 베르길리우스를 만난다.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을 보낸 사람이 다름 아닌 단테의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라고 알려준다. 사랑하는 연인이 구원을 위해 자신을 보냈으니 마치 “추운 밤에 고개를 숙이고 오므라든 꽃들이 아침 햇살에 모두들 줄기에서 활짝 피어나듯이” 그렇게 힘을 내라고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에게 말한다. 힘을 낸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나서 지옥문 앞에 도착한다. 지옥문 앞에는 이런 구절이 써 있다. “나를 거쳐서 길은 황량의 도시로/ 나를 거쳐서 길은 영원한 슬픔으로/ 나를 거쳐서 길은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나’는 물론 지옥이다. 지옥이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는 것이다. 지옥이란 어떤 곳인가? 바로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이다. 지옥이 자신을 일인칭 ‘나’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자꾸자꾸 읽다 보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나’가 정말 ‘나’라는 ‘인간’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나라는 인간을 통과하는 사람은 영원한 슬픔으로, 나라는 인간을 통과하는 사람은 모든 희망을 버리게 되는 것으로. 그러니까 지옥을 어디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누군가의 작은 지옥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단테에게 지옥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 빛이라고는 없는 암흑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암흑과 눈부신 빛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은 1941년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어두운 시절에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단테의 ‘지옥’을 읽는 파솔리니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파솔리니는 ‘지옥’ 26곡에 나오는 반딧불에 빠져든다. 26곡에 나오는 반딧불은 원래는 지옥에 빠진 정치인들이 뿜어대는 빛이었다. 파솔리니가 반딧불에 빠져든 것은 지옥 같은 세상이 어둡기는커녕 서치라이트와 번쩍이는 조명 덕분에 대낮같이 환했고 반딧불은 죄인들의 빛이 아니라 이런 세상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나오는 미약하지만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빛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정혜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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